이유겸(경제학부ㆍ04)

제48회 대학문학상에서 총 여섯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됐습니다. 30명이 응모한 소설 부문에서는 대상·우수작·가작이, 26명이 응모한 시 부문에서는 우수작과 가작이 선정됐고, 평론 부문에서는 5편의 응모작 가운데 우수작(영화평론)이 선정됐습니다. 희곡 및 시나리오 부문의 응모작은 없었습니다.
『대학신문』에서는 대상을 비롯해 모든 부문의 우수작, 가작 및 당선소감, 심사평을 싣습니다.

1.

대통령은 여전히, 건재했다.

2.

그에게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간다. 학교로 오는 지하철은 이상하리만치 항상 졸음에 잠겨있다. 모두가 혼수상태인 지하철 속에서, 그는 역을 놓칠까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하철에서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사람은 신문을 읽는 이들뿐이었다. 물론, 그 신문들은 대부분 광고가 덕지덕지 붙은 무가지들이었지만. 지하철 내 이산화탄소 농도가 2000ppm이 넘는다고 했던가. 그래서 졸린 건가. 무가지라도 읽으며 어딘가 정신집중을 해야 하려나. 무가지가 읽을 내용은 있으려나. 무가치하지 않기를. 그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정신을 잃는 이유를 나름 분석하며, 또한 나름 꼼꼼한 해결책까지 생각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 가도 그에겐 들을 수업이 없다. 휴학 중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가 큰 이유이긴 했다. 제대 이후, 복학한 학교는 그가 입대하기 이전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도서관에 파묻혀 깨알같이 받아 적은 필기를 단내나게 외우는 후배들의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과방에 들어가도, 자기 공부에 열중하는 후배들은 복학생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어보였다. 아. 나도 어느새 나이를 먹은 것이로군. 친구라고 해봐야, 입대 전에 사귄 동기들 몇 명만이 종종 술집에 모여 과거를 안주 삼아 노닥거릴 뿐이었다.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어느 학자의 말을 처세술 삼아 그는 사실 동기들과 고시학원에 적을 둔 판국이었다.

“본인은 조국의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17대 국회에서 제정한 사이버 공간 실명제 특별법을 오늘부로 발효함을 공포합니다… 모든 국민들께서는…”

고시학원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고시촌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고시학원과 편의시설들이 입점해 있다. 그래서 그는 학교 근처의 역에서 내려 도보로 고시학원을 가곤 했던 것이다. 고시원에 방을 잡는 것보단 그 편이 돈이 싸게 먹혔다. 길을 걷던 그에게 문득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발표가 들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니, 고층 빌딩에 부착된 대형 전광판으로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명에 비치어 밝게 빛나는 대통령의 대머리가 전광판에 나타났다.

“국민적 동의가 있는 만큼… 혼란을 겪지 마시고 정부의 안내문에 따라 실명으로 총무처 홈페이지에 등록을 해주시면 될 것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그래왔듯…”

대통령의 말투는 군인출신답게 딱딱하고 느렸다. 웃지 않는 표정. 그는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대통령이 웃는 모습을 매체를 통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그런 대통령에게서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과연 저 사람은 자기 딸들에게도 웃지 않을까. 그는 궁금했었다.

어쨌든, 그 굳은 표정의 대통령이 권좌에 앉아 있는 동안 정부로 들어가는 것은 가장 좋은 출세코스가 될 터였다. 군인출신답게 대통령의 추진력은 과감했다. 프로축구와 프로야구를 동시에 흥행시킨 나라는 세계적으로 남한뿐이었다. 두 개의 프로스포츠를 활성화 시킨 경력은 대통령의 명함 뒷장에 적혀 들어가도 손색 없을만한 공로였다. 그 뚝심은 하고자 하는 바는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강력한 정부를 만드는 밑거름이었다. 덕분에 대기업 임원이라 해도 정부 관료들에게 굽실거리기는 삼, 사십 년 전이나 매한가지였다. 고시만 합격한다면 무소불위의 경제기획원으로 들어갈 가능성도 있을 테고. 게다가 아직도 한국전력이 현대보다 기업규모가 컸다. 나이가 들어도 낙하산으로 갈 곳은 즐비했다. 그에게는 참으로 기분 좋은 장밋빛 미래였다. 물론, 고시에 합격하고 난 후의 이야기겠지만.

그러려면 저 대머리 아저씨가 좀 오래 대통령을 해먹으셔야 하겠지.

오래하실 것이다. 이미 대통령의 임기는 올해로 이십 팔년 째였다. 충성심을 다하는 휘하의 군부와, 경제부흥으로 도취된 민초들의 무관심은 앞으로도 쉽사리 변하지 않을 듯했다. 그의 왕국은 탄탄했다. 후계자를 영 엉뚱한 인물로 세우지만 않는다면, 그 후대에도 역시 이 군사정권은 영속할 태세였다.

그는 어느새 학원에 도착했다. 동기들과 같은 강의실에 들어갔다. 오전은 고시의 꽃, 경제학 수업이었다. 교수들은 목이 쉬어라 조잘대며 가르쳤다. 이 업종에서도 가르치는 사람들은 교수라고 불렸다. 분필가루가 휘날렸다. 칠판 위는 각종 그래프들로 빼곡히 차기 시작했다. 무차별곡선. 가격선. 수요공급곡선. 비용곡선. 선, 선, 선… 그가 생각하기에 경제학 그래프는 마치 먹이를 낚아채려는 노련한 거미의 거미줄 가닥과 비슷했다. 틈도 보이지 않고 촘촘히 박혀있는 아름답고 끈적한 죽음의 곡선. 수요와 공급의 거미줄이 만나는 곳에서 그의 선배들과 그의 친구들과 그의 아버지가 먹잇감이 되어 돌돌돌 말려있었다.

잘한 선택일까….

고시 공부를 하는 순간순간에도 다른 생각은 들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학교 도서관에 땀띠 나게 앉아 공부한다 한들 뭐가 보이는 형세도 아니었다. 취직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90년대 이후로 정권에서 대학정원을 자율화하는 바람에, 기업의 노동수요보다 대학생의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증가한 터였다. 종종 그는 대학정원 자율화가 학생운동을 분쇄시키려는 정부의 계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대학생의 숫자가 늘수록 취직은 어려워졌고, 취직이 어려워질수록 대학의 패기는 사라져갔다.

가능한 시나리오이긴 해….

물론 나름 명문대 출신이라는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취직은 되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아버지처럼 고생만 하다 이른 나이에 퇴직을 강요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척하면 이름을 알 만한 대기업의 중간간부였으나 50을 넘기지 못하고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취직을 해도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고시 한방이면 노후까지 권력과 안정적인 삶을 동시에 보장받을 수 있다. 적어도 이 군사정권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한은. 취직이 어려워지고 비정규직이 많아질수록 참으로 상대적인 매력을 더해가는 고시합격 아니던가. 그는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밖에 없었다.


“너, 인터넷 실명제가 시행되면 쪽팔려서 야동은 어떻게 받냐?”

“김본좌께서 연행되시매 경찰차에 오르시며 ‘너희들 중에 하드에 야동 한편 없는 자 나에게 돌을 던지라’ 하시니 경찰도 형사도 구경하던 동네 주민들도 고개만 숙일 뿐 말이 없더라-본좌복음 연행편 32장 9절 말씀도 모르냐? 크하하하”

“푸핫, 이 자식이 고시공부는 안 하고 인터넷만 하고 살았구먼. 어디서 그런 얘기는 또 들었어?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나라면 차라리 특별법의 행복추구권 침해를 이유로 헌재에 헌법소원을 내겠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 법 도입이 올해 행정법 쪽에서 강제집행수단과 엮여서 뭐 하나 출제될 가능성도 있겠는데? 이행 강제금과도 엮일 수 있을 것 같고.”

“듣고 보니 그러네?”

점심시간 내내 동기들의 화제는 오늘 대통령이 공포한 인터넷 실명제 특별법에 쏠려 있었다. 그 역시 인터넷에서의 무분별한 댓글이 익명성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지칭해서 ‘초딩’이라는 별명까지 붙이게 되었을까. ‘초딩’들은 무조건적인 안티글을 달면서 즐거움을 얻는 듯했다. 일관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논리는 빈약했지만 때로는 정부정책에 대한 기사에도 안티 댓글을 다는 ‘초딩’들이 생기곤 했다. 정부 입장에서도 하루빨리 인터넷 실명제를 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국민들도 초딩을 보면서 불쾌하긴 매한가지였다. 초딩들은 마치 독재자처럼 자기주장을 펴며 그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연예인에게도 안티 댓글. 기업들에게도 안티 댓글. 뭐든지 불만이었다. 하지만 국민들 중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회운동 같은 것은 나올 수도 없었다. 불쾌하다 할지라도, 국민들이 직접 나서는 일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큰 수고였다. 효용극대화의 원칙에 따르자면 효용을 얻기 위한 대가가 너무 큰 일이었기에 다들 바라만 볼 뿐이었다. 국민들은 누군가 이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길 원했다. 그런 면에서 정부는 참으로 유능했다. 실명제 특별법은 초딩들을 박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김본좌’라는 사람 역시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성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김본좌라는 사람은 일본에서 밀수해 온 음란물을 자신이 구축한 웹사이트에 올려놓은 뒤 회원들에게서 현금을 상납 받는 형식으로 수백억 원대의 이득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토록 커다란 사건이었지만 그동안 수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은 김본좌의 사업방식 때문이라고 정부는 밝혔다. 그는 인터넷상에 광고를 올려 회원을 모집한 것이 아니라, 점조직 방식으로 회원을 모집했다. 마치 피라미드 회사처럼. 김본좌의 웹사이트에 가입을 하려면 이미 가입한 사람을 알아야 했다. 그를 통해 사이트의 주소와 패스워드를 받고서야 가입할 수 있었다. 그의 웹사이트는 주기적으로 주소가 바뀌었다. 그의 웹사이트 주소가 바뀔 때마다 먼저 웹사이트를 이용한 회원으로부터 뒤늦게 가입한 회원에게로 바뀐 주소가 하달되어 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사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고 정부는 밝혔다. 결정적인 물증을 잡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파문은 컸지만 정작 김본좌의 행방은 묘연했다. 원래부터 정체가 묘연한 사람이었다. 김본좌라는 이름 역시 일부 국민들이 그를 추앙하며 붙여준 별칭이었다. 많은 국민들이 그의 헌신적인 희생 덕분에 쉽게 쾌락을 얻을 수 있었다며 칭송했다. 뒷골목을 배회하지 않게 되어 민생경제에 보탬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본좌’라는 이름은 ‘지존’보다 좀 더 입에 착착 달라붙는 발음이었다. 물론 국민들은 김본좌가 잡히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김본좌가 잡힌다면 또 누군가 그 자리를 메우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해줄 터였다. 국민들의 반응은 딱 ‘추앙’까지였을 뿐, 김본좌에게 발부된 구속영장을 철회하라는 목소리는 실상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김본좌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요즘 애들은 좋은 곳은 빨리도 다 찾아가나보군.

그는 내심 김본좌의 고객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던 사실을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말했던 본좌복음을 생각했다.

정부 관계자들도 정작 김본좌를 잡으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겠군.

그는 사실 고시학원을 오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21세기, 인터넷의 시대가 아닌가. 학원들은 수익을 늘리기 위해 앞다투어 인터넷 강의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 역시 인터넷으로 집에서 강의를 들을 생각이었다. 오고가는 시간도 귀찮고. 실강보다는 인강이 좀 더 저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인기 있다는 김 교수의 헌법강의는 이상하게도 인터넷 강의가 제공되지 않았다. 유독 그의 강의는 실강만 서비스 되는 것이었다. 울며 겨자를 먹어야 했다. 본명도 모르는 김 교수의 명강의. 그 강의에서 고시 수석합격을 비롯해 가장 많은 합격자가 배출되었기 때문에 그로서도 듣고 싶은 강의였다.

그 날은 김 교수의 헌법강의가 처음으로 시작하는 날이었다. 강의실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백 명을 수용하는 강의실에 백오십 명 정도는 들어온 것 같았다. 김 교수는 허여멀건 얼굴에 뿔테안경을 쓴 사람이었다. 그는 김 교수가 40대 초반 정도의 나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김 교수의 강의는 열정이 살아있었다.

‘아마도 젊은 시절 운동권이었다가 이 업종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중간 중간에도 헌법학자들을 비판하는 데 여념이 없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87년 서울폭동 때 한 건 했었던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대통령이 가장 좋아한다는 헌법학자인 칼 슈미트에 대한 비판은 근 한 시간 내내 이어졌다.

“결단? 여러분들은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헌법을 왜곡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적 헌법관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상황을 유지시키며 권력을 정당화해 이데올로기화할 뿐입니다. 이런 걸 고시문제라고 내는 학자들이라니….”

그는 비로소 왜 김 교수가 인터넷으로 동영상 강의를 팔지 않는지, 아니 못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무리 자율이 늘어난 시대라지만, 여전히 정부의 서슬 퍼런 눈초리는 반정부분자들을 향해 있었다. 이번에 시행된 인터넷 실명제 특별법 역시 그 예가 아닌가. 하지만 그로서는 김 교수의 강의가 마음에 들었다. 뭔가 시비 거는 듯하면서 핵심을 짚어주는 명강의.

흡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택배가 도착해 있었다. 보낸 사람은 ‘통일주체국민회의’였다. 박스를 뜯어보니 인터넷 모뎀이 있었다. 모뎀 옆에는 ‘민족 공동체적 개인주의를 달성하자!’라는 선정적인 구호가 붙어있었다.

민족 공동체적 개인주의라니.

그는 생각했다. 이건 히틀러가 속해 있었던 나치당의 본명이 ‘민족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인 것과 똑같은 꼴이잖아. 마치, 학관식당에서 남은 밥과 시금치와 치즈스테이크를 국통에 말아 넣고 하나로 섞은 듯한 꼴이야. 아무리 재료가 좋아도 차마 먹을 수 없는.

그는 모뎀을 새로이 컴퓨터에 연결하고 인터넷에 접속해 보았다. 대통령의 개인비서로 전락한 국민회의가 보내온 모뎀이었다. 아마도 이 모뎀 외에 다른 모뎀으로는 인터넷 접속조차 불가능하게 통신업체들에게 명령을 시달하였을 바였다. 초기화면이 정부에서 만든 포털사이트로 설정되어 있었다. 초기화면을 바꾸려고 시도해보았으나 강제적으로 고정되어 있었기에 바꿀 수 없었다. 역시 통제를 위해선 물적 기반이 필요했다. 모뎀은 착실하게 정부가 하라는 대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정부 포털은 여러 뉴스와 만화, 메일과 카페, 검색서비스 등의 잡다한 기능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그는 정부 포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주변 동기들은 모두 좋아했다. 재미있었고, 유익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국민은 정부 포털에 가입하여, 정부 포털에 로그인한 후에야 인터넷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정부 포털은 다른 모든 사이트들을 통제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게 된 것이다. 다만 그는 정보의 바다인지 정부의 바다인지 도통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포털 검색창에 ‘김본좌’라고 쳤다. 업데이트된 뉴스가 떴다. 뉴스를 읽어봐도 김본좌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는 한 가지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뉴스에 더 이상의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자기 이름표를 가슴에 달자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침묵했다. 새로운 세상이 온 것 같았다.

메일함을 보니 대통령의 이름으로 온 메일이 있었다. 클릭해보니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설문조사에 대한 참여를 권고하는 내용이 있었다. 참으로 친절한 대통령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편지를 보내시다니. 설문조사는 예, 아니오로 답해야 하는 문제였다.

이게 무슨 설문조사야. 누가 어떻게 답변했는지도 다 알게 될 텐데.

그는 투덜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통령은 묻고 있었다. 대학의 경쟁력강화와 고등학생들의 논술실력 배양을 위해 ‘두뇌조국21’사업의 일환으로 ‘핵심정리화 사업’을 추진하려고 하는데 국민들은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쭉 글을 읽어보니 ‘핵심정리화 사업’이 무엇인지 그는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한글로 출판된 모든 책을 요약해서 컴퓨터 파일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이었다. 범위는 넓었다. 역사, 철학, 문학, 경제, 열역학, 전자개론, 유전학 할 것 없이 핵심정리화 사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각 대학의 교수진과 선발된 학생들, 대학원생들이 이 일을 맡아서 할 것이고, 그 결과물은 대학입시 논술지도를 비롯하여 각종 기업의 입사 전형 등에 활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대통령은 이 작업에 앞으로 8년 동안 약 20조의 천문학적인 정부지원이 있을 것이고, 경제유발효과는 무려 50조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액의 정확함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을 해내겠다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표현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책 읽는 것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그는 별 고민 없이 ‘찬성’을 클릭했다. 사실, 대다수의 국민들도 고민 없이 찬성을 클릭할 것이었다. 좋아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특히 대학생들. 교과서 역시 핵심정리화 사업대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은 전반적인 공부량이 줄 수 있음을 암시했다.

어찌되었든 책의 부피가 준다면 읽기는 편해지겠지. 쓸데없는 말들은 읽지 않아도 되고. 대통령이 꽤 쓸모 있는 일을 하는군. 군인 출신이긴 하지만 유능하긴 하단 말야. 저렇게까지 얘기를 하는 걸 보니 결국 하긴 하겠군.

그의 예상대로 ‘핵심정리화 사업’은 약 80%의 지지율로 17대 국회 법안으로 상정되었다. 국민들은 책들을 요약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데 큰 기대를 보였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사회에서 짧은 시간에 요점만 뽑아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개인에게 이득이 될 것이었다. 정부는 국민들의 동의에 의한 지배를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며칠 동안 그는 꾸준히 학원 수업에 참석하는 한편, 동기들과 꾸린 스터디를 했다. 인터넷 실명제와 함께 대통령의 핵심정리화 사업은 공부하다 지칠 때쯤 항상 꺼내놓는 안줏거리가 되어 입방아에 올랐다. 며칠 동안 뉴스는 인터넷 실명제와 핵심정리화 사업을 과감하게 밀어붙인 대통령의 결단력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많은 국민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인 이상 잘되겠거니 하며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동기들도 안줏거리로만 그 이야기들을 치부할 뿐이었다.

외로운 고시 생활을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할 이들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동기들과의 스터디는 공허한 면이 있었다. 원체 스터디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답안을 작성하고 정직하게 서로의 답안을 채점하면서 수정할 부분을 체크해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심성의껏 동기들의 답안을 채점했다. 10점 만점에, 약간 아쉬우면 9점이나 8점. 방향을 잘못 잡았으면 6점 이하. 그리고 또 재량껏 추가점수.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답안은 항상 9점 내지는 10점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답안 작성에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높은 점수를 받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2,3년은 공부해야 하는 고시세계에서 그는 채 몇 달 되지 않은 초짜였음에도 동기들은 그에게 빨간 펜을 긋지 않았다. 그는 수없이 동기들의 답안지에 빨간펜을 그었는데.

“야, 내가 생각해도 내 점수가 너무 후하게 나온 것 같아. 이 상황은 부관의 위법성을 이유로 전체취소를 청구해야 하는 거 아냐? 책에는 그렇게 나오던데….”

“응? 아, 그거? 뭐,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데 너가 쓴 답안도 충분히 맞을 거라고 난 생각했어. 그렇게 써도 충분히 맞을 수 있을 거야.”

충분히 점수를 받을 것이라고 동기들은 말했지만, 그가 보기에 동기들은 서로에게 시뮬레이션 동작을 하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미소. 억지스런 답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지 않는 태도. 몇 번의 스터디를 함께 한 후 그는 스터디그룹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개인주의적인 사회라지만, 최소한 스터디 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신뢰해야 했다. 스터디 내에서의 개인주의는 공멸을 의미했다.

마지막까지 자기 속만 챙기는 놈들이라니….

씁쓸했지만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 동기들의 기분이 나쁘지 않게, 스터디를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는 말로 변명하며 그 그룹을 나와 버렸다. 하지만 스터디 그룹은 하나 정도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혼자 공부하다 고시에 낙방한 후 잡아주는 사람이 없어 피씨방을 전전하는 고시 폐인들을 주변에서 본 바가 있었다.

어디를 들어야 한다….

가장 좋은 스터디 그룹은 학원 교수와 함께 하는 그룹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룹은 보통 매 강의 초에 정원이 꽉 차기 마련이라 이제 와서 들어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경쟁률도 치열했고, 때로 그런 스터디 그룹에 들어가려면 거액의 뒷돈까지 따로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연금에 기대 생활하는 그의 집안 사정으로 보았을 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일단 그는 혼자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혼자 공부하기엔 학원 독서실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그날도 김 교수의 헌법강의가 끝나고 학원 독서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은 강의실을 빠져나갔고, 한 학생이 마이크를 정리하던 김 교수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저는 지난 반년 동안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학습방식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지키며 공부했습니다. 또 저에겐 돈도 아주 많습니다. 교수님의 스터디에 빈자리가 하나 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제가 그 스터디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얼마면 됩니까?”

그는 빤히 그 학생을 바라보았다. 요즘 고시세계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화되고 있었다. 고시생답지 않게 그 학생은 파란 꽃남방 셔츠에 머리에는 왁스를 잔뜩 바르고, 광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얼굴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김 교수는 그 학생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팔아 고시촌에 살고 있는 걸인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그 후에야 저는 당신을 제 스터디에 받아들이겠습니다.”
학생의 얼굴이 일순 당혹으로 굳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도대체 스터디와 내 재산을 나눠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거렁뱅이들에게 내 돈을 줘야 당신의 스터디에 들어갈 수 있는가? 자신만만했던 표정은 무시당했다는 모욕감으로 바뀌었고, 학생은 강의실을 떴다.

하지만 그는 김 교수의 발언에 강의실을 뜰 수 없었다. 사람들도 동기들도 모두 강의실을 빠져나갔지만, 그와 김 교수만은 강의실에 남아있었다. 김 교수가 그에게 다가왔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석이라고 합니다.”

“보아하니 지금 스터디를 안 하고 혼자 공부하는 듯이 보이는데, 제가 맡고 있는 스터디에 함께 들어와서 공부하겠습니까?”

석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터디 그룹이라고 하는 것이 물론 그의 필요한 바이었지만, 무엇인가 김 교수의 제안에는 불가항력적인 힘이 있었다. 자신의 가진 것을 자랑하며 나오던 부유한 학생은 퇴짜를 맞고, 자기 자신이 스터디 그룹을 하겠다고 부탁하기 전부터 먼저 다가온 김 교수의 접근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바였지만 놓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 후로 석은 김 교수의 스터디 그룹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그룹원은 적은 편이었다. 보통 여섯 명 정도가 하나의 스터디 그룹을 구성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김 교수까지 포함해 스터디 구성원이 네 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터디 구성원이 너무 많으면 한 사람 한 사람 신경 쓸 수 없잖습니까.”

인원이 적은 이유를 물어보던 석에게 김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석은 김 교수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강의실에서 보던 김 교수가 열정에 가득 차있는 활화산 같은 웅변가였다면, 오히려 스터디 그룹 내에서의 김 교수는 절간의 주지스님과 같은 인자하고 조용한, 그러나 자신이 맡은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해왔거나 게으르게 상대방의 답안을 채점할 경우에는 엄한 모습이었다.

한 달 정도 스터디는 순조롭게 굴러갔다. 석은 나머지 두 명의 구성원과도 친해졌다. 한 명은 학생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 졸업을 앞두고 느지막이 고시계에 입문한 ‘류’라는 이름의 남학생이었다. 그는 운동권의 당위성에는 지금도 충분히 공감하나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펼쳐보길 원한다고 했다.

“맨날 팔뚝질만 해서는 안 되겠더라고. 전략적 위치를 점하는 것도 필요할 듯해서 말야. 하하.”

그는 자신의 배경을 이야기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또 다른 한명은 유전학을 전공하던 ‘민’이라는 이름의 여학생이었다. 생명과학분야에서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만들려면 정부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고시계에 입문했다고 밝혔다. 그들의 자기소개에서 없는 사실을 억지로 꾸며내거나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느낌을 받긴 힘들었다. 이 업종에도 자신만의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신선한 느낌이었다.

하루는 김 교수의 방으로 스터디 구성원들이 놀러간 적이 있었다. 김 교수의 넓지 않은 단칸 방에는 가지가지 책들이 사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모두들 그 책을 보며 놀랐다. 책의 종류는 다양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신학자이자 히틀러 암살을 기도했었던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 등. 김 교수의 전직이 과연 무엇이었을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책들이 많았다. 석은 서가에서 검은색 양장본의 두툼한 책을 하나 꺼내들었다. 표지에는 <성서>라고 적혀있었다. 석이 책장을 찬찬히 넘길 때, 김 교수가 뒤로 다가섰다.
“성서를 읽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 어렸을 때 좀….”

김 교수는 뿔테안경을 고쳐 쓰며 천장을 응시했다.

“이제 이 책도 간략하게 요약이 되어 데이터베이스 안으로 들어가겠지요.”

“아, 예.”

김 교수는 무척이나 모더니티한 사람 같다, 고 석은 생각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책을 사서 자기 서가에 꽂아두는 사람이라니.

“석 군은 대통령의 핵심정리화 사업이 맘에 드시오?”

“……”

“사람과의 관계를 핵심만 요약해서 맺을 수 없듯이, 책을 읽는 것도 요약해서 읽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원본을 읽어야지. 그래야 저자를 만나지. 요약한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요약자뿐이라오. 지식은 전달될 수 있지만 저자를 만날 수는 없지.”

김 교수의 말은 일견 수긍이 갔다. 그가 다니던 대학에서도 정부의 핵심정리화 사업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나 인문계열의 교수들의 반발이 심했다. 그들의 논리도 김 교수의 논리와 유사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액수의 ‘두뇌조국21’ 지원금 자체가 커다란 유혹이었다. 또한, 어차피 국민들이 읽지 않는 책이라면 간략하게라도 요약해서 좀 더 친숙하게, 대중적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정부의 끈질긴 설득도 많은 교수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데 한몫했다. 대세는 핵심정리화 사업이었다. 석은 이참에 요약화가 끝나면 그동안 읽고 싶었던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요약본으로 읽어볼 심산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요약화를 반겼고, 논술시험으로 골머리를 앓던 일선고등학교도 반겼으며, 숙제가 줄어들게 생긴 학생들도 반겼다. 김 교수처럼 노골적인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출판업계 관계자들을 비롯하여 소수에 불과했다.

석은 논쟁적인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지난 한 달여간 스터디는 아주 좋았다. 단순히 공부만 같이할 뿐 아니라, 류와 민, 그리고 김 교수 모두 오랫동안 삶을 같이했던 동반자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들까지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따뜻한 이야기, 세상사는 이야기를 석은 하고 싶었다. 결국 석은 지난 한 달 동안 마음에 묵혀왔던 질문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그 날 왜 제게 스터디를 같이 하자고 말씀하신 겁니까?”

김 교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석군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라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목장으로 데리고 오는 기분이랄까? 난 다만 성서에서 읽은 대로 했을 뿐이오. 그게 예수의 방식이기도 하고.”

그런 것이었군. 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김 교수에게선 종교적 열정주의자의 냄새가 났다. 그렇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열정적이지만 때로 위험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석이 가지고 있던 성서를 잡았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겠지요. 이 성서를 핵심정리하면 무엇이 나올까요? 한 페이지에 요약된 성서. 고대 유대인들의 역사 반 페이지. 예수의 생애 사분의 일 페이지. 윤리적 덕목 사분의 일 페이지. 사람들의 입맛에 딱 맞는 성서. 사후에 천국과 영생을 보증하는 한 페이지 보증서가 나오지 않겠소. 과연 그런 요약서에서 저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성서는 개인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석은 김 교수가 달변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하는 세계를 좀 더 알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석은 자리를 피했다. 어물쩡 어물쩡 그의 질문을 넘기면서 석은 화장실을 가는 척 방을 빠져나왔다. 김 교수는 방을 나가는 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석의 메일함에는 대통령의 새로운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17대 국회에서 인터넷 실명제특별법과 함께 또 다른 법이 제정되었음을 알리는 메일이었다. 참으로 친절한 대통령이었다. 메일의 내용인즉슨, 과다한 고시 열풍을 잠재우고 풍부한 학습을 경험한 인재를 정부에서 고용하기 위해 고시선발제도에 일대 개혁을 가지고 오는 법안이 제정되었다는 것이었다. 행정법, 경제학, 재정학 등의 과목을 시험을 통해 뽑는 기존 고시선발제도를 변경, ‘두뇌조국21’의 핵심정리화 사업 참가자를 우선적으로 자체 시험 후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내년도 고시합격정원은 평년의 30%수준으로 줄어들고, 70%의 인원을 사업에 참여한 대학원생 및 학부생 중에서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앞으로 향후 5년간 핵심정리화된 각 학문분야별 저자들의 책의 요약본이 정부 고시선발제도의 검인정교과서로 통용될 것이라는 소식 또한 함께 딸려왔다.

석은 메일함을 닫고 의자에 몸을 푹 수그렸다. 스터디 그룹에서도 김 교수와의 사이는 뭔가 어정쩡했다. 석은 행여 김 교수가 데모라도 같이 나가자고 할까 봐 두려웠다.

고시학원 교수가 데모는 무슨.

하지만 김 교수의 모습을 보건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스터디 그룹의 분위기는 따뜻했으나, 그 그룹 안에 있기 위해서는 언젠가 비용을 치러야 할 것만 같았다. 유전학을 공부했던 민은 그 이후에도 차분히 공부에만 열중했지만, 운동권에 몸을 담은 전력이 있었던 류의 모습은 심상치가 않았다. 그동안의 공부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류는 특유의 선동가적 기질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학교에서는 보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었지만 엄연히 석의 눈앞에 있었다. 류는 종종 고시촌 인근에 대자보를 붙이곤 했다. 처음에는 정부의 법적안정성을 저해하는 행동, 고시생들의 신뢰를 깨뜨린 책임 등을 추궁하며 신뢰보호의 필요를 주장하는 글귀였지만 갈수록 글은 전투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결국 핵심정리화사업 자체의 부당함을 따지는 쪽으로 바뀌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가 대자보를 붙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난 한 달 동안 류를 유심히 관찰한 석은 그 대자보가 류의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 류는 김 교수를 설득하기 시작할 것이다. 예전처럼 다시 사람들을 조직하자고.

김 교수는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예전처럼 강의를, 스터디 그룹을 꾸려갈 뿐이었다. 김 교수로서는 학생이 아니라 사회인인 만큼,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정부의 발표가 나온 이후 고시생들은 급감했다. 고시학원은 울상을 지었다. 업종이 존폐의 위기를 맞았다. 김 교수의 강의에도 빈자리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고시학원에 나가지 않았다. 김 교수의 자리에 간단한 편지와 작은 선물만을 올려놓고, 그는 그곳을 떠났다. 그는 대학원 연구실과 담당교수를 찾았다. 복학을 하고 학교로 돌아와 보니, 함께 스터디를 했었던 동기들은 이미 저마다 두뇌조국사업에 참여 하려 각기 다른 연구실에 들어간 후였다. 한번 만나보고도 싶었으나 저들끼리도 연구실에 들어온 이후로는 만나지 않은 듯하여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운 좋게 그는 안면이 있었던 교수의 연구실로 들어가 핵심정리화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맡은 일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요약하는 작업이었다.

3.

삽화: 강동환 기자

지하철의 공기는 여전히 혼탁했다. 바뀐 점이라면, 이제는 지하철 내에도 티비가 달렸다는 것이었다. 보통 몇 주 지난 시시껄렁한 드라마 하이라이트나 뉴스 정도가 티비에서 나왔다. 이제 승객들은 무가지를 보지 않고 티비를 보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하는 사람은 없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이산화탄소로 가득 찬 공기를 마시며 반쯤 잠에 취해 승객들은 티비를 시청했다. 그도 역시 티비를 봤다. 이전만큼 심심하진 않았다. 뉴스에는 인터넷 실명제 덕분에 김본좌가 잡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김본좌는 얼굴을 당당하게 들고 카메라를 쳐다봤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모양은 읽을 수 있었다. 크게 소리치는 듯했다. ‘나.는.김.본.좌.가.아.니.다.’하지만 정부가 그를 김본좌라고 했으므로 그는 김본좌였다. 무척이나 친숙한 얼굴이었다. 정부는 김본좌를 잡은 자신들의 공로를 자찬하며 이번 사건을 해결한 몇 명의 직원들을 내부 승진키로 했다고 인터뷰했다. 조국정부는 완벽하기 때문에 미해결되는 범죄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뉴스가 흘러나왔다. 고시제도의 변경에 반대하던 폭력시위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고 했다. 이익집단화된 고시업계의 소비자들과 생산자들을 책망하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졌다. 이익집단은 자본주의 사회의 적입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티비를 보기 싫은 듯했다. 그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그는 다시 마르크스를 요약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마르크스가 독재를 주장했다고 믿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다. ‘너.는.마.르.크.스.가.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다. 사람들은 원서를 읽지 않을 테니까. 사람들은 김본좌가 잡혔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을 알기 귀찮아 할 테니까. 예수를 죄를 사해주는 공짜표 정도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성서를 읽지 않을 테니까. 대통령을 민족의 지도자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역사를 읽지 않을 테니까. 자기 자신이 만족스런 삶을 산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읽지 않을 테니까. 상관없었다. 그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지하철의 공기는 갈수록 탁해졌다. 그는 깜빡 정신을 잃고 역을 지나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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