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이의 죽음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됐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폭탄 테러에 희생된 고(故) 윤장호 병장의 이야기가 연일 들려온다.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는 하나같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책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그의 죽음을 잘못된 파병 정책이 부른 비극으로 보는 사람들은 ‘철군으로 윤 병장의 희생에 답하라(2월 28일자 한겨레 사설)’고 촉구한다. ‘한국이 세계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 해외 파병을 해야 한다(2월 28일자 조선일보 사설)’는 사람들은 조기철군이 윤 병장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 있으므로 테러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양 쪽은 윤장호 병장의 죽음을 자신들의 주장에 이용하고 있다고 서로 비난한다.

그러나 파병 찬반 논란을 떠나, 이미 한 젊은이가 희생되고 나서야 쏟아져 나오는 논의들을 지켜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이번 사건이 철군의 계기가 된다고 한들, 아니면 그의 죽음이 애틋한 애국의 이름으로 찬양받는다고 한들 그 부모와 친지의 깊은 슬픔을 달랠 수는 없을 것이다. 생명을 짓밟는 폭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다.

‘좋은 전쟁’은 없다. 테러 조직을 소탕하겠다는 명분도 지금 미국이 수행하고 있는 전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피는 피를 부를 뿐, 폭력의 악순환은 무력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 안정을 위해 파견된 다목적군과 평화유지군이 오히려 지역민의 반발을 일으켜 갈등을  불러오는 한 증거다. 게다가 테러 조직 소탕이라는 목적도 사실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중동 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석유 자원 확보와 자국 영향력 확대 때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상식이다.

설득력 없는 ‘테러와의 전쟁’에 소위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은 오히려 국제 평화에 반하는 일이다.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다산부대와 동의부대는 지역 재건을 돕는 공병과 의료진으로 구성됐다고 하지만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미군 기지의 토목ㆍ건축 공사와 다목적군 진료다. 실질적으로 전쟁을 지원하고 있기에 언제든 우리도 테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한대도 해외 파병이 ‘국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국민의 생명에 우선하는 국익은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흘린 피 속에서 건질 ‘이익’도 탐탁지 않다. 더욱이 그 이익으로 한국이 국제 분쟁에 휘말려 증오의 표적이 된다면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해외 파병을 고무하기 위해 이라크 자이툰 부대 등에 지원하는 장병들을 ‘애국’이란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마다 해외 주둔군에 지원하는 이유와 개인적 소신이 다를 수 있겠으나, 대개 짧은 군복무 기간과 높은 수당에 이끌려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對)테러전이 이제는 아프리카 전역으로 번질 조짐을 보인다. 지난달 8일 미군은 이슬람 세력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소말리아 남부 지역을 공습했다. 사망자는 대부분 민간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증오와 테러의 씨앗을 뿌린 셈이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끊임없이 국제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 전쟁으로 무고한 사람이 수없이 죽어 가고 있다.

진실로 국제 평화를 생각한다면 정부는 하루 빨리 이라크ㆍ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분쟁 지역의 파병군을 철수해야 한다. 민간 구호 단체 지원이나 NGO활동만으로도 충분히 그 지역의 재건과 안정을 도울 수 있다. ‘평화를 위한 전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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