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영화였는데,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 묘한 위화감이 들기 시작했다.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설정들을 이해하고 ‘박자를 맞춰’ 웃으려면 영문학사에 대한 어느 정도 소양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 연출자가 웃으라는 신호를 노골적으로 보내는 대목에서도 극장 안에서는 웃는 이가 없었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뿐이었다.

 

결국 영화가 끝나고 커다란 사전을 뒤적거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영문학사상 중요한 실존 인물들이었다는 것을 알아내기는 했으나, 나는 그때 느낀 어색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예컨대 내가 아프리카나 중앙아시아의 문학사를 패러디한 영화를 보았다면, 그런 어색함이 가당키나 했을까? 오히려 ‘왜 저들은 인류의 보편적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이야기만 할까?’라는 식으로 그 영화를 만든 이들의 ‘좁은 소견’을 나무랐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셰익스피어 알지? 그러니까 이 영화도 보고 웃어야 해. 웃지 않으면 무식이 드러나니 낭패”라면서 자기네 이야기를 아무 설명도 붙이지 않고 세계에 수출하는 쪽이야말로 거만한 것이지, 그네들의 전통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구미 중심으로 꽉 짜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너무나 애쓴 탓일까? ‘변방’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중심’에 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모르는 것이 창피한 일이 되어 버렸다.

 

‘중심’과 소통해야만 하는 변방인의 슬픈 운명
우리 것에 대한 기백과 배짱 잃지 말아야

 

우리가 만들지 않은 거대한 질서 안에서, 소통의 책임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영어에 대한 강박관념은 거기서 비롯된다. 지나친 강박관념은 종종 목적과 수단을 뒤바꿔 버린다. ‘왜 영어를 (잘)해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명쾌한 대답도 내놓지 못한 채, 아니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혀에 기름칠을 하고, 각종 영어 시험점수를 1점이라도 올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곤 한다.

 

‘물신’의 자리에 오른 영어에 대한 갈망이 드세질수록, 정작 갈고 닦아야 할 우리말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인터넷이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말을 틀리게 쓰는 것을 지적하면 ‘꼰대’라거나 ‘잘난 척 한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지만, 영어로 아는 척을 하면 아무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서 온 국민을 상대로 오락 시간에까지 영어를 가르치려 하지만, 정작 방송 자막을 엉터리 우리말이 가득 메워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나라, 이것이야말로 ‘변방’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우리가 구미 중심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해도 모든 지식이 영어로 변환되어야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열린 ‘국제동아시아과학사학회’에 참석했을 때 이채로웠던 일들 가운데 하나는, 구미의 학자들이 모두 유창한 중국말을 구사하더라는 것이다. 비록 현실적으로 영어 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도 그런 기백(?)은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국 사람에 동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것을 영어로 알려서 그 결과 미국 사람이 우리말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기 위해 영어를 공부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 두둑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김태호 과학사및과학철학 협동과정ㆍ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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