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검사와 의사만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상상하는 일은 끔찍하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판검사·의사가 된 사람과 판검사·의사가 되지 못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공동체를 상상하는 일이다. 모두가 율사(律士)나 의사가 되려 한다. 문과의 수재가 법대를 가지 않으면 네가 제 정신이냐 운운의 힐난을 뒤집어쓰고, 이과의 천재가 의대를 가지 않으면 넌 내 자식 아니다 운운하는 비난에 부딪친다. 그래서 아버지가 의사인 의사 아들과 아버지가 변호사인 변호사 딸이 결혼하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아들은 의사가 되고 딸은 변호사가 된다. 아, 이 동종교배의 제국은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한가.  

이것은 매우 기형적인 상황이다. 율사와 의사는 여느 직업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서비스직이다. 물론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매우 특수한 전문영역의 것이다. 그것은 존중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율사와 의사가 한 사회의 권력층 혹은 지도층의 위치를 점하는 일은 기이한 일이다. 누가 권력을 갖고 한 사회를 지도하는가? 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제 한 몸에 체현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매진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판검사와 의사를 존경하지 않는다. 어떤 판검사와 의사만을 존경할 뿐이다.

대학사회는 어떤가. 과거의 대학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었다.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 2000년대 한국의 대학에는? 율사나 의사가 되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앞의 이분법은 아프지만 뒤의 이분법은 씁쓸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는 기왕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열린사회가 되어가는 듯했다. 미디어 인프라는 세계최고수준에 도달했고 우리가 경험 가능한 세계는 무한대가 되었다. 그래서 90년대에 10대를 보낸 이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제 삶을 베팅하는 통쾌한 상상력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관악에 입성한 3397명 신입생의 내면에 단 두 개의 꿈이 있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3397개의 가슴에는 3397개의 꿈이 있어야 자연스럽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국 명문고에 부임한 괴짜 선생 키팅은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 운운하며 명문가계 귀한 자식들의 앞길을 아름답게 망치기 시작한다. 율사나 의사가 되어야 마땅한 아이들이 시를 쓰고 연극을 하고 사랑에 빠진다. 동굴에서 회합을 갖는 그 서클의 이름은 ‘죽은 시인의 사회’다. 우리가 태어날 때 마음속의 시인도 함께 태어난다고, 어떤 시인은 살아남고 어떤 시인은 죽는다고,  그러니 내면의 시인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라고 그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그 ‘사회’는 차라리 아름다웠다. 여기 ‘유산된 시인들의 사회’에 비한다면 말이다. ‘검은 법복’과 ‘하얀 거탑’의 나라에서, 시인들이여, 부디 사산(死産)되지 말아라, 기어이 태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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