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다시보기 - 다양한 장르들

20세기 중반 이후 퍼즐미스터리와 하드보일드의 경계를 넘어 추리소설에 새로운 시도가 등장했다. 이 시기 추리소설 작가들은 서스펜스와 스릴 등의 요소를 추리소설에 접목시키거나 탐정 대신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고조되는 서스펜스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서스펜스와 스릴의 구분은 전문가들도 꺼리는 편이다. 대개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되거나 둘로부터 느끼는 감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추리문학 평론가 박세진씨는 “굳이 나누자면 서스펜스 소설은 심리적인 소재를 통해 공포감을 유발하고 스릴러물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소재를 통해 상황의 긴박함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스티븐 킹의 『살렘스 롯』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실종되거나 죽어간다. 며칠 뒤 이 사람들이 밤마다 흡혈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공포감이 서스펜스다. 또 할리우드 영화들을 보면 미국의 영웅이 비행기나 버스 같은 속도감 있는 장소에서 현란한 액션으로 악당의 공격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 스릴이다. 추리문학 평론가 박광규씨는 “스릴러물은 대개 주인공이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냉전 체제가 낳은 ‘스파이’=2차대전이 끝나자 세계는 냉전체제에 접어들게 된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국제정치 상황에서 각 국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인다. 스파이를 통한 치열한 정보전이 바로 그것이다.

보통 스파이라고 하면 이언 플레밍이 창조한 ‘제임스 본드’의 멋진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파이의 세계가 그렇게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스파이 세계의 암울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소설에 등장하는 영국 스파이 리머스는 본드와 같은 영웅이 아니다. 한때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활약했지만 나이들어 용도폐기되는 퇴물 스파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와 인생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한다.

리머스는 결국 ‘추운 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다 닳은 지우개가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알고 있었다. 인터넷 추리문학 사이트 운영자인 권일영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공장 부품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냉전시대의 스파이는 국가의 소모품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추리소설의 변화=시대의 변화는 추리소설에도 나타났다. 하드보일드가 자본주의의 부조리한 현실을 작품 속에 투영했듯, 스파이 소설도 냉전체제의 비정한 현실을 이야기했다.
독자 또한 추리소설의 변화를 원했다. 수수께끼(퍼즐미스터리)는 심심했고 폭력(하드보일드)은 진부했다. 그래서 작가는 인물의 심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서스펜스와 스릴은 입맛을 잃은 독자에게 새로운 청량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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