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저항은 계속된다-오창룡(정치학과ㆍ박사과정)

언제나 국가의 경계를 벗어나는 존재, 유목민
무엇이 그들을 무리짓지 못하게 하는지 찾아야

들뢰즈ㆍ가타리는 『앙띠 오이디푸스』(1972)와 『천개의 고원』(1980)에서 ‘유목’ 개념에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특히 『천개의 고원』에서 ‘전쟁기계’의 발명자로 설정된 유목민의 모습은, 자유를 찾아 현재의 속박에 저항하는 민중의 상(像)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유목민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그려진다. 먼저 유목민들은 정해진 땅에서 항상 떠나고, 이동하고, 약탈하는 무리다. 이 유목민 혹은 야만족들은 오고 가며, 국경을 지나가고 강탈하지만, 또한 통합되고 재영토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속박과 통제를 벗어나는데, 그것은 예측 불가능하다. 유목민들은 국가의 내부에 국지적으로 퍼져있는 빈 공간에서 끊임없이 경계 밖으로 넘쳐흘러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낸다. 반면 국가는 다시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저항의 흐름들을 국가 안으로 내면화한다. 이러한 상호과정 속에서 국가는 항상 동일한 모습으로 자신을 유지하고, 내면화된 경계를 다시 넘어야 하는 유목민의 저항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변신해 나간다. 유목민들이 자발적인 예속을 중단하고 경계 밖으로 나오는 것은 이들이 ‘정념(affect)’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패거리, 무리, 집단들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자아를 들어올리고 요동시키는’ 무의식적인 역능에 이끌려 죽음을 무릅쓰게 된다.

저자들은 이러한 민중의 흐름이 스스로 파시즘으로 나아가게 될 수 있음을 반복해서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유목민’이라는 개념에는 신중하지만 동시에 낙관적인 전망이 반영되어 있다. 알튀세르가 “우리의 현세기는 대중의 총체적 탈정치화의 세기다”라며 현실을 비관했던 시기에, 들뢰즈는 “왜 새로운 유형의 혁명이 가능해지는 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가?”라며 반문한다. 권력의 공포와 계산된 통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흐름이 분출하는 것. 들뢰즈ㆍ가타리에게 이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낙관은 좌절과 절망의 시대에 분명 희망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들뢰즈ㆍ가타리가 민중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대한 무리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 무리들이 공유하는 정서적인 끈, 연대정신 등에 주목하였던 것은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시대에 ‘유목민’이라는 어떤 완전히 새로운 실체가 변혁의 주체로 등장할 것이라 기대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유목민은 역사에서 반복해서 등장했던 민중들의 힘의 분출을 상징할 뿐이다. 다만 주어진 경계를 넘기 위해 구체적인 실천의 방식이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개인으로 화석화된 철조물들을 한 순간에 녹여 거대한 용광로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폭발의 도화선들이 이미 한국사회 도처에 널려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현재를 구속하고 있는 울타리들 역시 전례 없이 견고해지고 있다. 야속하게도 들뢰즈ㆍ가타리는 민중들의 ‘정념’이라는 도화선에 언제 어떻게 불이 붙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유목의 시작을 무작정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혼자 떠나는 유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 무리를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직시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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