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종
수의대 교수·수의학과

우리 사회에서 이공계의 위기라는 표현은 인문학의 위기라는 논란과 더불어 더 이상 새로운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포항공대를 수석 졸업한 학생이 미련 없이 의대로 진학해 대학 기초학문의 위기상황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 학생이 열거한 이공계 대학원생의 노동자 같은 모습과 졸업 후 예상되는 열악한 장래에 대해 그 누구도 반론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불행히도 이러한 위기 상황은 학문과 후진 인력의 양성을 강조한 BK사업에 의해 막대한 자금이 10여 년 가까이 대학에 투자됐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1990년대 말 국민정부 이후 정부산하의 유능한 기술연구소를 대부분 통폐합시킨 후 대학지원금을 미끼로 그들의 기능을 대학에 흡수시킴으로서 대학과 산업계를 연계하는 시책을 실시하고 있다. 결국 몇몇 대기업 연구소 외에 제대로 된 연구소가 없는 국내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고급인력을 수용할 장소는 사라졌고, 생산성과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논문 숫자만으로 이뤄지는 평가에 이공계 교수와 대학원생이 과학자라기보다는 산업과 연계된 기술개발자나 논문 작성을 위한 노동자로 전락한 것도 사실이다.

한편 인문·사회과학이나 이공계열 학문 모두 인간과 그 삶을 위한 것임을 전제로 할 때, 물질문명이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지금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위해서는 자연과학자에게는 인문학적 사유가, 인문학자에게는 자연과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통찰이 요구된다. 그러나 단순 기술개발로 변질돼 가는 대학의 이공계 위기에 대해 인문학자들은 침묵하고 있다. 이는 학문 간의 소통 단절 속에서 자연과학이란 그저 단순한 기술개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많은 사회적 함의를 지닌 황우석 사태에서 보여준 인문학자들의 무지와 혼란이 좋은 예다. 이공계에 필요한 인문학적 사유를 제공하지 못하는 절름발이 인문학은 변질돼 가는 이공계 학문과 더불어 파편화된 인간의 모습을 우리 사회에 제시할 뿐이다. 다른 여러 이유도 있겠지만 그런 면에서  자신의 영역에 함몰된 인문학이 나름대로 위기를 맞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며, 이것은 정부 주도의 대학 교육정책으로 빚어진 대학 정체성 혼란과도 일치한다. 결국 기초학문의 위기 속에는 이공계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가 서로 맞물려 있다.

비록 정부로 인해 대학이 정부산하 기술연구소와 같이 돼버렸지만 이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통합적 인간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두 학문의 본래 정체성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대학의 왜곡된 정체성도 되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유명한 정부산하 연구소를 설립해 고급인력이 자긍심을 갖고 취업할 수 있는 사회제도의 확립도 시급하다. 교내에서는 산업계와 관련된 연구 및 업적을 위한 연구중심 교수 제도와 학문의 기초를 담당하며 학생들과 사유하는 교육중심 교수 제도를 실시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근 교내에서 시도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과 자유전공제, 문·이과의 구분 없이 일정 학생을 선발하는 안 등은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