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형준 사회부장
신용카드 ‘열풍’의 조짐이 보인다. 하나은행이 연초에 “카드회원수를 두 배로 늘리겠다”고 공언한 데 이어, 우리은행도 다음달 2일 새 카드 브랜드를 내놓고 영화할인 등 각종 부대서비스를 내세워 공세적인 영업을 펼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소득이 없는 내 친구에게도 발급된 카드를 보면 지난 2003~2004년의 ‘카드 대란’이 떠오른다. 정부는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1999년부터 카드 사용을 장려했다. 카드 회사들은 이에 호응해 소득이 없는 대학생들에게도 카드를 발급해주는 등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을 시도했다. 호황을 구가하던 카드회사들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 이유는 관대한 현금서비스 허용 때문이었다. 당시 신용카드의 고객들은 수수료가 원금의 24~29%에 달하는 현금서비스를 편하다는 이유로 마구 이용했지만, 회사가 예상한 만큼 돈이 상환되지 않았고 연체율은 전체 현금서비스 고객의 20%에 육박했다. 이 때문에 카드회사들은 부도 일보직전까지 갔고, 카드 대란 때문에 양산된 400만 명의 신용불량자는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다.

‘카드 대란’은 두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 번째는 개별적인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자율이 24%가 넘는데도 서슴없이 돈을 빌렸다. 그리고 상환이 어려워지자 다른 카드회사에서 또 이자율 20% 이상의 현금서비스를 받아 이른바 ‘돌려막기’를 했다. 분명히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소득수준을 넘어서는 소비를 했던 것이다. 너무나 근시안적인 사고다.

따라서 개별적 인간의 불합리에 대한 어떤 견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말을 경제에 적용한다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될 것이다. 최근 경제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의 힘을 숭배하고 정부의 영향력을 평가절하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하지만 한국은 자본이 소비자들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불완전경쟁시장이자, 대자본에 의한 진입장벽으로 인해 많은 분야가 독·과점된 시장이다. 더불어 ‘카드 대란’과 같은 치명적인 시장실패를 생각하면 국가 단위에서 개별적 인간과 자본의 불합리에 대한 견제를 해줄 만한 유일한 조직인 정부가 경제에 대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카드 대란’의 경우 많은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할 어떤 것으로 봤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 자신이 갖기엔 무척 어려운 것이라도 사회의 영향으로 욕망할 수 있다. 따라서 때에 따라서는 욕망을 충족시키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다. 루이뷔통이나 구찌 같은 명품이 우리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주체적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들의 원천을 알아보고,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욕망을 우리 자신의 기준을 세워 걸러내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예가 진로문제다. 부모님으로 대표되는 사회는 돈이 되는 직업을 갖기를 추천하는데, 그것이 내 기준에 맞지 않을 때 과감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주체적 삶이다. 물론 깊이 생각해 본 후 부모님이 추천하는 직업이 내 기준과 맞을 때 그 직업을 택하는 것 역시 주체적 삶이다. 문제는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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