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익계산만이 반영된 한·미 FTA 신자유주의적 교류 방식 넘는 대안적 교류 방식 필요해

이병훈
철학과 석사과정

칼 마르크스는 인간 교류의 확대 정도를 세계사 발전의 척도로 간주했다. 공산주의자였던 그가 부르주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데에는 부르주아가 인류 교류의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는 판단이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는 고도의 역사적 발전 단계를 경과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결국에는 부르주아적 교류의 한계를 지적했던 것처럼, 전세계를 횡단하는 자본주의적 교류의 눈부신 확대가 동시에 그에 상응하여 만성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빈곤문제와 환경문제 등을 낳고 있으니 참으로 역사의 얄궂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러한 사실은 교류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 못지않게 ‘어떤 방식으로’ 교류가 행해지느냐의 문제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켜준다. 지불/비지불 혹은 소유/비소유의 양가적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교류 방식은, 예를 들어 남아도는 미국의 곡물이 무상으로 아프리카의 기아 구제에 쓰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초과 노동에 시달리지만, 다른 누군가는 정반대로 실업으로 고통받는 상황도 자본주의적 교류 방식의 제한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잉여와 결핍이 공존하며 서로 조건 짓는 ‘비상식적인’ 교류 방식이 지배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최근의 한·미 FTA도 이런 관점에서 조망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의 FTA 체결에 대한 각계각층의 우려는 단순히 경제적 손익 계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FTA 체결이 가져올 진정한 후폭풍은 바로 그것의 영향을 받을 우리네 삶의 광범위한 변화다. 물론 FTA가 자본주의적 교류의 양적 확대임은 틀림없으며, 그런 한에서 일부의 관점에서는 분명히 사회적 선(善)의 증대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양적 확대가 우리 삶에 어떤 질적 변화를 가져올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광우병이 생활의 직접적인 위험요소로 우리 곁에 상존할 수 있으며, 의료 공공성이 약화되어 사소한 질병에도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신자유주의적인 교류의 확대가 야기할 ‘새로운’ 삶의 조건들인 셈이다.

FTA를 추진하는 정부와 기업의 설득 논리가 지닌 문제점은 여기에 있다. 즉 이들이 내세우는 FTA 추진 논리에는 오직 지표상의 손익계산만이 앙상하게 반영되어 있을 뿐, 그것이 우리의 구체적 삶과 맺는 연관은 소거되어 있다. 한 마디로 ‘남는 장사’면 ‘OK’라는 식이다. 이러 식의 찬성 논리는 FTA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신자유주의적 교류 방식 논리의 반복에 다름 아니다.

일방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교류 방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적 교류 방식을 발전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류 방식은 누군가가 대신 마련해 주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창출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는 도덕적 당위 주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위력이 현실 속에서 꾸준히 입증될 때에만 대안적 교류 방식은 ‘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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