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인 에로티시즘 영화와 싸구려 포르노물을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정사 장면에서 두 육체 바깥의 현실적 맥락들을 계속 떠올리게 하면 예술이고, 맥락을 지우면서 무조건적인 정사에 탐닉하면 포르노다. 육체에 새겨져 있는 성차별의 징후를 보게 만들고, 근대문명의 비인간성과 대결하는 인간 안의 자연을 성찰하고, 개인을 억압하는 제도의 횡포 등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면 그것은 아무리 노골적이어도 포르노가 아니다. 요컨대 ‘맥락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니 성기 노출 여부만을 근거로 포르노를 식별해내겠다는 식의 발상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실은 그 발상이야말로 포르노라고 해야 한다. 맥락을 보지 않고 성기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통령의 말을 앞뒤 맥락 없이 인용해서 집요하게 조롱하는 일부 언론들의 행태는 그런 의미에서 포르노에 가깝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다만 토론의 의제가 되어야 할 말들을 단숨에 추문으로 만드는 그 순발력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맥락을 바꾸는 일에도 발빠르다. 극소수의 땅부자와 집부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세금폭탄’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폭탄 같은 수사학인가.

『대학신문』이 대학가 근처에 난립하고 있는 유사성매매 업소를 잠입 취재했다. 기획 의도를 상세히 밝힌 기사들이 있었고, 실태를 비판하고 해결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사들도 있었다. 르포는 그 전체 기획의 일부였다. 성매매에 무덤덤한 세태에 비판적 자극을 주고자 했다. 그 의도가 충분히 관철됐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비판할 수 있다. 불필요하게 자세한 부분도 있었고, 했으면 좋았을 말을 안 하기도 했다. 반성해야 하고 또 반성하고 있다. 그러나 맥락 없이 해당 기사만을 도려내어 선정적으로 부각한 일부 언론의 태도는 공정하지 못했다. 엉뚱하게도 ‘2억원의 지원금’ 운운하면서 맥락을 바꿔놓았고, 10분 동안의 마사지와 40분 동안의 취재를 ‘50분 동안의 성매매’로 바꿔치기했다. 맥락을 못 읽었다면 멍청한 것이고, 일부러 안 읽었다면 교활한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한 영혼의 맥락을 읽어내는 일이다. 영혼의 맥락을 제거해 버리면 연인은 한낱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비판은 한 대상에 내장돼 있는 여러 맥들을 두루 살펴야만 가능하다. 맥락을 보지 않고 부분만을 비판하는 일처럼 쉽고 신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맥락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의 연애처럼 유치한 일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현실이 포르노를 모방한다’고 말했다. 포르노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맥락이 없는 포르노를 보듯 현실을 맥락 없이 판단하면 결국엔 현실이 포르노가 되고 만다.  신형철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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