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으로 봉타고 올라가랴. 도자기 깬 범인 잡으랴. 말 안 듣는 아들에게 하이킥 날려주랴, 요즘 가장 바쁘게 사는 분을 만났다. 올해 72세의 나이에도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정정함을 내뿜는, 그러면서도 이웃 할아버지와 같은 편안합을 동시에 지닌 배우 이순재씨. 인생의 제3막에서 '거침없이 하아킥'을 날리는 그의 삶 속으로 대학신문이 들어가봤다.

 

 

 

◆요즘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계십니다.
어제도 새벽 3시까지 촬영을 했어. 범이 녀석(연기자 김범씨)이 또 물건을 깨서 그 ‘놈’ 잡느라고 봉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느라 아주 힘들었지.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 원장 역은 가부장적인 면을 과시하려 하지만 막상 실속은 없는  속이 텅 빈 인물이야. 그래서 더 다양한 모습을 표현할 수 있어. 근엄하고 때로는 권위적이지만 엉뚱하고 실수 많은 모습 때문에 젊은 층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거 같아. 나이 많은 사람이라 어렵게만 느꼈는데 가만히 보니 자신과 비슷한 면도 많단 말이야.  “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저 할아버지도 그렇네?”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거지.

 

◆문리대 철학과 54학번이신데, 당시 학창시절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 시절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젊은이들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도 제한적이었어. 학교 옆 ‘별장다방’이나 캠퍼스에 앉아 친구들과 선문답같은 ‘헛소리’나 하고 그러는 게 대부분이었지. 오락거리도  마음먹고 극장에 몰려가 영화를 보는 게 다였어. 극장에서 교수님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마치 친구 사이처럼 자리를 맡아 드렸어. 그땐 지정된 좌석이 없어서 교수님이 멀리서 중절 모자를 던져주시면 그걸 받아 내가 앉았던 자리에 놓는 식으로 자리를 넘겨드렸지.
그래도 지금 추억해보면 학생들이나 교수들이나 낭만을 즐기던 시대였지.

 

◆대학생 때 연극회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어떻게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이 길에 들어서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영화를 무지 좋아했기 때문이야. 내가 문리대 최고의 영화 박사였어. 당시 영화관에서는 셰익스피어 전문가들이 만든 작품들을 많이 상영했는데, 그 배우들 연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지. 저런 연기 한번 해 봤으면 싶더라고.
워낙 연기에 관심이 많다보니 학교 연극회 활동도 열심히 했어. 신영균씨(치대·55년 졸업), 고(故) 이낙훈씨(미대·56년 졸업) 등을 보고 연극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에 사로 잡혔지. 그러다 연극회가 해체돼 버려서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연극회를 재건 하게됐어.
3학년 때부터 연극을 했는데, 연기를 잘 한다고 칭찬도 곧잘 받았지. 그때 칭찬을 안 받았으면 현재 내 모습은 없었을 지 몰라. 허허… 
아 참, 수험생 시절에 서울대에 원서를 내고 서라벌예술대(현 중앙대로 편입)에도 지원할까 막연히 고민하기도 했어. 그때 예술대에 갔더라면 더 빨리 영화감독이나 배우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나고 보니 연기를 시작하는 시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하고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알고 하는 게 낫더라고. 지금까지 연기 생활을 하는 것도 다양한 시각과 경험, 그 덕분인 것 같아.

◆당시 배우에 대한 편견 등으로 본격적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하는 게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하긴, 당시에는 배우에게 ‘무절제한 생활’과 ‘무능한 경제력’이란 편견이 따라 다녔어. 하지만 나는 워낙 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지. 그래도 대학 다닐 때 교수님들과 아버지의 이해가 연기 인생을 시작하는 데 큰 영향을 줬어.
교수님들은 나에게 세상의 다양한 면을 보도록 깨우쳐 주셨고 낭만과 꿈을 가르쳐 주셨지. 한번은 연극 공연을 앞두고 합숙 훈련을 해야 하는데 마침 졸업 학기 기말에 딱 걸렸어. 당시 철학과 고(故) 고형곤 명예교수(고건 전 총리의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더니 단번에 “해. 연극도 철학이야”라며 격려를 해 주시더라고. 한달음에 달려가 연극을 했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내가 철학과 학생이라 연극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졸업 후에도 연극 활동을 잊을 수가 없어 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 당시 활발한 연극 연출가로 이름을 날리셨던 고(故) 이해랑 선생님께 연기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 드리고 이것저것 준비를 했지.
그때 집은 한국전쟁 때 피난한 후 줄곧 대전에 있었는데 내가 한동안 연락이 없자 걱정이 되신 아버지께서 서울로 직접 올라오셨어. 내가 머리를 장발로 기른 채 “연극을 하겠다”고 말씀 드리자 아버지는 “앞으로는 뭘 해도 일류가 되면 밥은 벌어 먹을 거다. 열심히 해라”라는 말씀을 하시며 지갑에 있는 돈을 모조리 빼 주고 가시는 거야. 그 후로 공연을 시작하기만 하면 첫 팜플렛에 초대권 두 장을 붙여 집으로 보내드렸지. 와서 보시고 돈 좀 주고 가시라고. 하하. 아버지께서도 연극·영화 분야에 관심과 조예가 깊으셨어. 아버지의 이해가 없었다면 연기를 시작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거야.
연기활동 초기 때는 연극을 주로 했어. 당시에 연극은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국립극장의 연기실력은 내가 보기에 좀 부족했지. 또 거기 들어가 강습생을 하기도 싫었고. 그래서 동료들, 고(故) 허규(연극인), 고(故) 이낙훈(연기자), 김의경(전 서울시립극단장), 김성옥(연극인), 오현경(연기자)씨 등이 모여 ‘신원극장’을 창립했고, 그 참에 다른 민간 극단인 ‘자유극장’ 등도 생겼어.
만약 우리가 국립극장 등으로 흡수됐다면 연극계에 한 흐름만 있었을 텐데 우리가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독창적인 방법을 만들었지. 그게 한국 연극계에 다양한 흐름이 공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본인과 닮은 작품 속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가정에서도 TV  속 모습과 같으신가요?
요즘 잘 아는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내 모습을 찾자면 비슷한 모습이 별로 없어. 나는 평소에 남과 아귀다툼을 하지 않지. 양보하는 타입이야. 밑지는 듯, ‘손해 보며 살자’가 평소 생각이라 주위에 적대관계가 없어.
그런 성격 탓에 어린 후배들과도 어려움이 없지만 가정을 돌아보면 나도 뭐, 그리 좋은 아버지는 못 돼. 밤샘 촬영과 사회활동 등으로 일 년에 며칠을 빼고는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다보니 말이야. 집에 있는 ‘할망구’는 내가 안 들어가도 이제는 허전해 하지를 않아. 젊어서부터 워낙 익숙해 졌거든.  미안하지 뭐.

◆14대 국회에 진출하시는 등의 정치 활동으로 잠깐 ‘외도’를 하셨는데요.
나의 본직은 연기야. 정치를 하면서도 언제든 연기로 돌아가겠다는 주관이 있었어.  정치가는 국가 경영에 기여를 하겠다는 큰 의지도 중요하지만 작게는 어느 한 분야를 대변해 그 분야를 위해 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내가 그런 경우인데, 1980년대에는 문화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았어. 특히 대중예술 분야의 소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 그러던 중 당시 여당 민주정의당에서 연예인이었던 고(故) 이낙훈씨를 비례대표로 뽑았어.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지. 그때 이낙훈씨가 문화계 문제 해결을 위해 내게 도움을 청했고 그것을 계기로 정치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된 거야. 그 후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문화계 인사의 저작인적권 보호 등 관련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지.
원래 문화정책은 워낙 광범위해서 추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지. 한류(韓流)만 봐도 알 수 있어. 한류가 언제까지 지속되리라 기대할 수 없잖아. 정부가 앞장서서 문화를 이끌지는 않더라도 뒤에서 뒷받침이 돼 조건을 만들어줘야지.  일본 만화와 소설을 다시 우리가 리메이크해서 드라마, 영화를 만드는 걸 보면 벌써 역류가 일어나고 있어. 정책적으로 대비를 해야 해. 그걸 행정가가 할 수도 있지만 해당 분야에 있었던 사람들이 좀 더 구체적인 대책을 내 놓을 수 있는 거야. 문화정책은 효과가 짧은 기간에 나타나지 않아서 4년이라는 제한된 시간에 실적 쌓기를 원하는 국회의원들에게서는 기대할 수도 없는 거지.
또 정치에서 연기자 이미지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이미지만으로 정치를 할 수는 없지. 인기 배우가 간다고 그곳이 표밭이 되는 세상은 아니야. 지역구 사람들과 나 사이의 믿음을 쌓고 깨끗한 양심으로 소신을 지키는 게 중요해. 나에게는 아직도 중랑구에 가면 한 달쯤은 공짜로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끈끈한 정이 남아있어. 권유도 있었지만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연기를 더 하고 싶었어.

 

◆그 외에 수많은 사회 활동도 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이것저것 활동을 많이 하게 됐어. 봉사단체 홍보나 복지 부분에서 주로 활동하는데… (때마침 울리는 전화를 받고나서) 지금도 불우이웃돕기 걷기대회 행사에 참석을 하라고 그러네. 내가 거기 고문을 맡고 있거든. 이전 지역구였던 중랑구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우면서도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는 틈새계층을 지원하는 일을 처음부터 시작해 회장직만 3년째 하는데, 아, 이거 날 또 시킬 거 같아. 허허허. 이렇게 바쁘게 지내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 얘기하면 피곤한줄도, 힘든줄도 모르겠어.

◆다양한 모습의 노년 역할 연기나 평소 자신의 경험에 비춰 봤을 때 한국 노년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제 우리 사회 활동제한 연령도 75세로 늘어나야 해. 한국사회 노령인구가 곧 500만 명이 될테고 앞으로 더 늘어나겠지. 여러 활동을 하다보면 경제적 자립 능력이나 여가 활동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많이 만나는데 사회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양하게 힘 써야 해.
나이가 많은 분들은 그동안 세월 속에 쌓아온 경륜이 있어. 그 경험을 무시할 수 없다고. 사회가 그것을 재활용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 젊은 사람들과 연대해서 지혜와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제도나 프로그램 등이 많이 마련됐으면 좋겠어.
또 노인 스스로 자신의 일거리를 찾아야지. 수익성 있는 일거리나 봉사활동 등 무엇이라도 찾아서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회사를 정년퇴임하고 드라마 엑스트라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지.  못다 이룬 꿈을 위해 새로운 시작을 하는 등 각자가 삶을 찾는 노력을 해야지.

◆서울대에, 그리고 서울대 학생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을 전해주세요.
고등학교 때 한국전쟁으로 난리를 겪고 나니 대학생활이 무척 소중했어. 4년 동안 학교를 참 열심히 다녔지. 낭만적인 분위기와 향취가 그렇게나 좋더라고.
이전보다 사회가 훨씬 복잡해지고 해야 할 일도 많아지다보니 학생들이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아.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대학생활에는 ‘낭만’이라는 것이 있지. 대학생활을 하면서 과제에 치이기보다 낭만을 좇아 추억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어.
요즘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울대를 둘러싸고 말이 많아. 지금은 사회적 기반이 취약해 정부가 교육의 평등성을 위해 대학에 간섭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대학자율화가 돼야 한다고 봐. 또 서울대는 우수한 학문기관으로서 그 권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학문적으로 노력했으면 하지.
아 참, 이제 연극영화예술학과 하나 정도는 생겨도 되지 않겠어? 허허허.


1935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1954년 서울고를 졸업하고 1954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2000년에는 경희대 한의대 명예한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세종대 연극예술학과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순재는 1956년부터 연기활동을 시작해 연극, 영화, TV 드라마 등 현재까지 70여 편의 작품을 했다. 14대 국회의원(민자당, 서울 중랑갑)으로 국회 문화공보부위원회위원과 민자당 부대변인을 지냈다. 1966년과 1996년에 각각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주연상을, 1996년 KBS  연기대상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에는 문화관광부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현재 연기자협회 회장을 비롯해 대한적십자사 친선대사,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회장 등을 지내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


이순재씨는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석좌교수로 지난 1998년부터 10년 동안 대학에서 강의도 맡고 있다. 연극 고전을 통해 학생들과 소통하며 연기의 의미를 찾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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