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 (이명랑, 문학동네)

시간이 흐르면 세상이 변한다고 했다. 즉 시간은 그 흔적을 곳곳에 남긴다는 말이다. 이명랑은 신작 『입술』 속 9편의 단편소설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 보인다.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난 이명랑은 『삼오식당』(2002)에서 자신의 문학적 고향인 영등포시장의 명랑하고 쾌활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하지만 도심 재개발사업 때문에 이명랑은 상인들과 함께 영등포시장에서 추방당했고 문학적 영토를 잃었다. 변화를 모색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이명랑은 결국 새로운 창작 영역을 찾아나섰고, 2년에 걸친 탐색과정을 『입술』에 담았다.

영등포를 떠나 낯선 세계를 떠돌던 이명랑의 눈에 띈 것은 타인을 향한 적의와 증오를 간직한 채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혹은 자신을 철저히 고립시킨 사람들이다. 「사령死靈」에는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상기’가 등장한다. 상기의 형수인 ‘나’를 포함해 가족 모두에게는 상기가 ‘그저 냄새를 풍기며 죽어가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제대로 앉을 수도 없는 상기는 나를 비롯힌 바깥세상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지만 가족은 그런 상기를 외딴 방에 가둬버린 채 빨리 죽기만을 바란다. 결국 하루라도 제대로 일어서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보기를 원했던 상기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눈을 감는다.

「널래 날래 까우리로 까이라?」에서 작가는 문학의 탐색 영역을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의 아픈 역사로까지 확장한다. 작품에는 태국의 치앙라이에 거주하고 있는 고구려의 후예 ‘라후족’이 등장한다. 에이즈에 걸린 서양인들이 들어와 1달러짜리를 뿌리며 라후족의 순결한 어린 소녀들을 유린하는 모습 등을 통해 작가는 소수민족의 문화가 서구문명에 의해 폭력적으로 말살되는 과정을 담아냈다.

세상 밖으로 나선 이명랑은 “이제야말로 저 ‘삼인칭의 세계’로 나는 곧장 걸어갈 것입니다”라며 자신이 마주친 새로운 세상을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것임을 선언한다. 과연 그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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