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와나미(岩波) 출판사의 『이와나미 신서(岩派新書)』와 프랑스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의 『플레야드(La Pl?iade) 총서』는 해당 국가의 기초학문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한국에서도 양질의 학술총서가 대우재단과 (주)도서출판 한길사 등에 의해 발간돼 학계 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다. ‘대우학술총서(대우총서)’ 편찬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대우재단은 1981년 김우중 회장이 기탁한 200억원을 기초학문 연구사업에 지원해 현재까지 600여 권의 총서를 발간했다. 또 한길사는 창사 20주년을 맞은 1996년에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모험』을 필두로 ‘한길그레이트북스(한길북스)’ 시리즈를 시작해 현재까지 84권의 총서를 발간했다.

학계에서 두 학술총서의 위상은 매우 높다. 대우총서 시리즈 중 하나인 『한국지질론』이 1986년 한국과학기술도서상 저술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에는 『마키아벨리 평전』이 제2회 가담학술상 번역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도서가 호평을 받고 있다. 대우총서에 비해 역사는 짧지만 한길북스 시리즈도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와 에릭 홈스봄의 『혁명의 시대』 등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했다. 대우총서 관계자는 “매년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해서 석학연속강좌를 열고 있는데, 외국의 학자들도 대우총서와 관련된 자료와 성과물을 보고 매우 놀란다”고 말했다.

이렇듯 학계 발전에 꼭 필요한 역할을 하는 학술총서지만 연구·출판 지원의 측면에서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 한길북스의 배경진 실장은 “국가적 지원이 일절 없는 상황이지만 기초학문을 지킨다는 자부심만으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술총서에 대한 지원도, 학술총서의 판매도 여의치 않아 다른 도서의 이익으로 그 손해를 충당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우총서의 경우 대우재단에서 후원해 한길북스보다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대우재단은 대우총서를 위해 연구비와 출판비를 모두 지원한 뒤 다시 출판사로부터 대우총서를 사들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1998년 IMF 사태로 대우재단의 사정이 어려워져 출판지원이 줄었고 이 때문에 담당 출판사가 민음사에서 아카넷으로 바뀌기도 했다.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연구·출판 지원부터 구입까지의 전 과정을 한 재단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태한 상황이다.

학술총서 관계자들은 총서 판매를 통해 이익을 얻기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다. 살림출판사와 책세상 등 문고판 제작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시도를 꾀하는 출판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법이 근본적인 도움이 되진 않는다. 살림출판사 관계자는 “실용화·대중화가 가능한 분야의 학술서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어려운 분야의 학술서도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이 근본적인 방편이 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우총서 관계자는 “지원이 없어 학술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서들을 출판하지 못하는 출판사들이 많다”며 “연구자들의 많은 논문이 사장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려면 총서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술총서 발간이 활발한 프랑스는 국립과학원(CNRS)에서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교수를 선발해 30년 이상 집중 지원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학술진흥재단에서 저술 및 출판지원사업 명목으로 총서 발간을 원하는 연구자들에게 지원을 하고 있지만 지원 기간이 일 년 미만인 등 체계적인 지원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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