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규(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온 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른바 학부제와 광역단위 모집으로 인해 순수 인문학 전공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절대적으로 줄었으며, 이는 곧 새로운 연구 인력의 부족과 후속 학문 세대의 단절로 이어진다. 거기에 대학에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강제되면서 학문을 실용성의 기준으로 위계서열화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진행됐으며, 이 과정에서 당장 실용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 인문학은 대학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일종의 ‘계륵’으로 전락했다.

사실 이러한 분석 자체가 이미 식상한 일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또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 아닌가. 이런 마당에 인문학의 위기를 소리 높여 외치는 행위 자체가 희극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계속해서 “인문학이 위기다!”라고 외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문학의 위기란 사실 인문학이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상황에 기인한다. 인문학이 사회와 소통하지 못한 채 대학 안에서 고립돼 지극히 고답적인 논의만을 반복할 때, 인문학의 사회적 지위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과거 인문학이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과의 실천적인 소통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윤리와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구체적인 담론을 형성해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80년대 인문학이 가치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당대 민주주의와 해방의 기획에 대한 실천적인 담론들을 대학 외부의 사회 현실 속에서 생성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교도소에서 문학 강의를 하는 선생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그 선생님은 대학에서 학점을 위해 강의를 듣고 외워서 ‘모범 답안’을 써내는 학생들보다 문학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진행하는‘죄수’들과의 수업이 훨씬 좋다고 하셨다. 교도소라는, 교화가 ‘강요’되는 공간에는 정작 ‘죄수’의 주체적인 삶의 성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문학을 통해 이들이 스스로 주체적인 윤리를 탐색할 수 있다면 인문학은 충분히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단 교도소일 뿐이랴. 신자유주의적 폭력이 난무하는 시기, 개체의 윤리와 공동체적 지향에 대한 탐색이 부재한 시기, 궁핍한 삶이 있는 모든 공간에서 인문학이 할 일들은 무궁무진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는 실상 대학 안에 안주하며 사회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두려워하는 인문학 스스로가 자초한 것일 따름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이런 맥락에서 ‘유령’일 따름이다. 그 유령은 끊임없이 스스로 재생산한다. 그러나 이 유령은 실재가 아닌 실재를 가리기 위한 가상의 것이라는 점에서 허망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유령과 대면하고 ‘인문학의 위기’의 실상을 직시하는 것이다.

언제나 선택된 소수가 아닌 평범한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형성되는 지성이야말로 그 현실 적합성을 획득할 수 있는 법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남은 것은 사회와의 소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문학의 발랄한 ‘도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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