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조 교수(법대·법학부)

나는 한글의 창제는 오랜 한문생활에 침윤된 우리 문화에 즉물성(卽物性)을 회복시킨 쾌거(Restoration of the Reality)라는 의미에서 서양사에 있어서 로마법의 계수(繼受)(Reception of Roman Law), 종교개혁(Reformation), 문예부흥(Renaissance)과 더불어 4R이라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한글전용론자다. 그러나 오늘날 한글전용의 모습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한 인간학 책에서 “무상성”이란 단어를 보고 無常性인가 했는데, “무상성(gratuita)”을 보고서야 無償性임을 괄호 속 이탈리아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비허(kenosis)”에 이르니 그리스어를 보고 우리말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 판이다. 요즈음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 하는 식의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쉽게 이해시키려면 “正義의 定義”라고 하면 될 일을 한자를 금기시하는 ‘친절한 필자씨’께서 굳이 영어를 덧붙여준 것이다. 이런 식의 한글전용은 우리 문화를 위축시키다 못해 파괴하는 저급의 한글전용이고, 그래서 나는 결단코 반대한다.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는 한글전용파 국어학자들의 기여가 지대하다. 그래서 나는 이들에게 유감이 아주 많다. 무늬만 한글 전용을 주장했지, 직무유기가 매우 심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근본적인 오류는 언어가 제대로 된 문화 역량의 담지자(擔持者)가 되려면 자체 조어(造語)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무시하는 비과학성에 있다. 또 문화 역량은 축소 지향의 언어정책으로는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성급하게 우리 문화의 중추였던 한자를 배제한 그 저돌성에 있다. 한자어를 음만 한글로 표기하고 한글전용이라고 우기는 것은 국어무식쟁이 국민을 양산하는 하지하책(下之下策)일 뿐이다. 배우기 어려우니 한자는 그만두자는 핑계는 그야말로 사이비 교리다. 영어는 배우기 쉬워서 배우는가. 우리말의 대종을 이루는 한자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젊은 세대들이 개념의 이해에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우리의 말과 글이 그 사이에 얼마나 빈약하고 빈곤해졌는지 걱정되지도 않는가. 몇 가지 제언을 하겠다.

첫째로, 한자어를 대체할 고유어를 두루 개발하고(가령 의성어→소리시늉말처럼), 그 사전을 편찬해야 한다. 또한 반대로 고유어-한자 사전(가령 속이다-궤 詭; 기 欺; 류 謬; 무 誣; 사 詐; 탄 誕; 편 騙; 홍 哄; 휼 譎)도 만들어 신조어 개발에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로, 새로운 시대에 부응해 새 자모를 개발해야 한다. 나 자신 몇 년 전 서양어 ‘f’ 및 ‘v’의 음가를 표기할 새 자음으로 ‘立와’ ‘∀’를 제안한 바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우리 한글의 문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셋째로, 꼭 필요한 경우 적어도 한자를 병기하는 지혜를 살려야 한다. 이런 경우의 한자 사용에 대해서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의사소통이 최우선 기능인 언어의 본령을 몰각하는 짓이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한 성경의 말씀(개역판 고린도전서 14:10~11)이야말로 소리글자인 한글에 특히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 야만이 되지 맙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