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 그는 종교학의 연구대상을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와 종교에 대한 거대담론을 만든 종교학자다. 엘리아데는 ‘성현’, ‘근본으로의 회귀’, ‘원형으로서의 신화’ 등의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당대 지성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도 문학·음악·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대학신문』은 엘리아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학문을 재조명하는 기획을 준비했다.


‘1=1+1’의 공식은 참? 수학자가 들었다간 펄쩍 뛸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엘리아데의 종교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명제는 참일 수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상상해보자. 그리고 ‘1’이라 하자. 이 나무는 다시 두 나무로 나뉜다. 자연 상태의 나무가 하나다. 그리고 우리가 그 나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 시각적 인식대상에서 뛰쳐나와 자연 상태와 다른 ‘초월적 실재성’을 지니는 나무가 다른 하나다. 일례로 서낭당의 신수(神樹)를 들 수 있다. 자연 상태로 존재하는 이 나무는 우리가 ‘신수’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초월적 실재성을 지닌 나무로도 기능하는 ‘1’의 존재인 것이다.

이 사례에서 ‘자연 상태’와 ‘초월적 실재’의 범주를 엘리아데식으로 풀어보면 각각 ‘속(俗)’과 ‘성(聖)’에 해당한다. 엘리아데는 저서 『성과 속(The Sacred and the Profane)』에서 정반대의 개념인 성과 속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현실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연 상태의 나무든 우리에게 성스럽게 경험되는 나무든 일상에서는 하나의 나무일 뿐이지만, 그 하나의 나무는 자연 상태의 모습과 우리에게 경험되는 모습 두 가지 모두를 발현함으로써 하나의 나무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엘리아데는 인간의 존재양태를 성과 속이라는 분리되지 않는 상이한 두 범주를 통해 기술하려 했으며, 속으로부터 성이 발현되는 현상을 예증하는 것을 평생의 탐구내용으로 삼았다. 또 성스러움이 속(俗)으로부터 비롯하면서도 정작 속과는 정반대의 성질을 띠게 되는 ‘역(逆)의 합일’의 과정을 명명하기 위해 ‘성현(hierophany, 성의 드러남)’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성스러움 자체인 신(神)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기존의 신학 연구와 달리, 엘리아데는 인간이 경험하는 성현을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며 종교를 하나의 현상으로서 인식하고 서술하려 했다. 성과 속의 개념은 종교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한 방법론적인 범주인 것이다. 한국종교학 1세대 학자인 정진홍 명예교수(종교학과)는 엘리아데에 대해 “종교현상을 기술하는 행위는 비일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아닌 소박한 삶의 현실을 묘사하는 일일 뿐이라고 주장한 인물”이라며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불교·기독교 등 개별적 종교에 몸담기에 앞서 어떤 사물을 성현으로 여기거나 여기지 않는 경험을 먼저 하게 되는 셈”이라고 설명한다. 즉 엘리아데가 설명하는 종교적 인간(homo-religiosus)이란 특정종교를 믿는 신앙인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주체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엘리아데는 주장한다. 현대인은 세계에 대한 고대인의 이해 방식 일부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고. 이에 대한 사례로 ‘시간축적에 대한 두려움’을 제시한다. 고대인들은 시간이 축적될수록 자신들의 죽음이 가까워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제의를 통해 ‘지금 이 순간’을 태초의 ‘그때’로 되돌림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려 했다. 엘리아데의 시각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해석한다면, 연인들이 100일 기념파티를 통해 최초의 만남을 기념하는 것이나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일에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짐하는 것은 모두 고대인의 의례와 같은 경험구조를 지닌 것이다.

그는 또 고대인의 ‘성스러움을 경험하고자 했던 열망’은 공간에서도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먼 옛날 한민족과 인도민족이 ‘우주의 중심 축’으로 설정한 신단수와 수미산이 바로 그것이다. 각 나라가 펴내는 세계지도엔 모두 자국이 속한 대륙이 중앙에 위치해 있다. 이 현상 역시 성산(聖山)과 같은 경험구조를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어서 엘리아데는 종교학은 ‘창조적 해석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잃어버린 인간의 창조성은 ‘사람들이 성현을 통해 원형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열망과, 이 결과가 축적돼 나타나는 종교현상의 문화적 맥락과 존재론적 의미를 읽어내는 창조적 해석 작업’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담론은 인간 모두에게 의미있는 현상이라는 그의 주장이 더욱 타당성을 갖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엘리아데의 주장에 대해 몇몇 비판이 있다. 그 중 가장 빈번히 제기되는 것은 엘리아데의 주장이 비역사적이라는 비판이다. 엘리아데는 ‘태고’에서 인간이 본받고 따라야 할 ‘원형’을 발굴함으로써 원형으로부터 일탈한 근대문명을 비판한 바 있다. 여기서 모든 사물을 원형으로 환원하는 행위는 곧 사물로부터 ‘역사’를 제거하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비역사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종교사(史)를 연구해야 하는 그의 본업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지적인 셈이다.

용어를 뜻의 구분 없이 사용해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한 예로 그는 ‘역사’라는 낱말을 원형에 대립되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동시에 인간 삶의 전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 탓에 독자는 문맥에 맞춰가며 용어를 해석해야만 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중심’을 이야기하면서 중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주변’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인간은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는 그의 주장에는 일상의 인간은 주변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돼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주변부에 대한 언급을 미미하게 한 사실은 엘리아데가 자신의 중심이론을 강하게 주장하기 위한 의도적인 등한시가 아니냐는 비판의 근거가 된다. 이처럼 그의 학문에 대한 비판과 재반론이 맞물려 엘리아데는 여전히 종교학계에서 논쟁의 중심에 서있다.

엘리아데가 종교학계의 거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종교연구의 흐름을 180도 바꾼 인물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종교학계는 연구대상을 일상과 구별된 초월적 존재(신) 그 자체에서 찾았으며 고대종교를 현대종교보다 열등한 것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엘리아데의 사상을 접하는 순간, 종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일상으로 향한다. 종교란 특이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인간현상 가운데 있는 하나의 속성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토테미즘에서의 성현과 기독교, 불교 등에서의 성현이 모두 같은 것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모든 종교가 같은 층위에 놓이게 됐다. 이처럼 종교를 바라보는 주요관점을 통째로 바꿔버린 그의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우리는 종교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 담론을 수용할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됐다.

「대부」, 「지옥의 묵시록」으로 유명한 코폴라 감독이 조만간 엘리아데의 일생을 다룬 액션 스릴러물 「젊음 없는 젊음(Youth without Youth)」을 통해 스크린을 찾는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엘리아데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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