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은 항상 변화하는 공간
'유용한 지식'의 기준도 변해
'오류 가능성' 인정하는
실용주의로 거듭나야

과학자와 광신도의 차이는 무엇일까?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라는 책에서 과학자는 자신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광신도는 자신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과학자가 상대적 믿음의 소유자라면 광신도는 절대적 믿음의 소유자인 것이다. 칼 세이건은 이러한 기준에 따라 외계인 숭배나 만병통치약 등과 같은 광신의 실제 사례들을 고발하고 있다.

요즘 실용주의가 회자된다. 현장에서 쓸모 있는 지식이 중시된다. 현장 속으로라는 구호도 높게 울려 퍼진다. 대학도 이에 발맞추기 위해 변신을 꾀한다. 그런데 말은 그럴 듯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상황이 쉽지 않다. 무엇이 현장에서 쓸모 있는 지식인가? 대기업 또는 일류 기업만이 현장이 될 수는 없다. 현장은 한 군데가 아니다. 수도 없이 많고 한도 없이 다르다. 그렇게 많고 저렇게 다른 현장에 걸맞은 맞춤형 지식을 일일이 가르칠 수는 없다. 또한 현장은 불변의 공간이 아니다. 21세기의 디지털이 영생을 누리라는 법은 없다. 현장은 계속 변한다. 변하는 현장에 맞추어 변하는 지식을 일정한 시공간 속에서 한꺼번에 가르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현장에 맞는 지식에 대한 교육은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수도 없이 많고, 한도 없이 다르고, 계속 변할지라도, 지금 이곳의 현장에 대한 어느 정도의 표본화가 가능하다. 표본화된 현장에 필요한 기본적 지식을 마련하고 이를 교육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막상 현장에 부딪혔을 때 기초적 지식을 응용하고 활용하는 유연하면서도 끈질긴 능력이다. 자신이 익힌 기본적 지식을 현장에 맞추어 검증하고 수정하는 지속적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응용하고 수정하는 능력을 함양시키는 교육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현장은 지식을 통해 개선되고 지식은 현장을 통해 연마된다.

실용주의가 강조하는 것이 현장에서의 ‘유용성’이라는 점은 맞다. 그렇지만 실용주의의 또 다른 강조점이 ‘오류 가능성’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현장의 특징으로 인하여 이곳에서 옳았던 지식이 저곳에서는 틀릴 수 있다. 가변적인 현장의 특징으로 인하여 한 때 옳았던 지식이 다른 때는 틀릴 수 있다. 자신의 지식이나 믿음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 그 지식은 각각의 현장에 걸맞게 수정되어 진정한 실용적 지식으로 거듭날 태세를 갖출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실용주의는 과학의 적자이다.

실용주의는 미국의 발전을 이끌어 가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덩 샤오핑도 검든 희든 고양이는 쥐를 잘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적 모토를 내걸고 중국의 발전을 주도해 나갔다. 발전하는 국가는 자신을 개방한다.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오류를 지적받고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지식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그 지식을 현실에 확실하게 적용하는 일. 그러한 일은 자신을 닫는 일이다. 실용주의와 거리가 멀다. ‘오류 가능성’을 인정치 않는 ‘유용성’은 위험하다. 절대 믿음과 반쪽 실용이 만날 때 실용주의는 도그마가 되며, 도그마화 된 실용주의는 현실을 개선하기 힘들다. 물론 이 글 또한 오류 가능성에 묶여 있다. 그렇지만 그 묶여 있음으로 인해 글은 오류를 넘을 힘을 얻는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