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도 교수(고려대 언어학과)


한국어 번역본 『일반언어학노트』(불어원본: Écrits de linguistique générale, Gallimard)를 처음 접했을 때, 반가움과 동시에 놀라움과 의아함이 교차했다. 작년에 대학원에서 이 책을 학생들과 강독했을 때,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더라도 과연 얼마나 판독될 수 있을지 자문하곤 했다. 기존에 나와 있는 『일반언어학강의』의 확신에 찬 명료한 논리적 언어와 대비적으로 이 책은 상당히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언어, 거의 동양의 명상적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더구나 소쉬르 사상의 형식을 특징짓는 미완성의 시학을 웅변하듯, 수백 여곳에서 빈칸의 여운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특히 불어 원서)의 정확한 학술적 가치를 자리매김할 때 먼저 지적되어야 할 문제는 다양한 층위의 ‘편차들’의 존재가 될 것이다. 유럽의 소쉬르 연구와 국내의 소쉬르 연구 및 번역 상황의 편차, 그리고 소쉬르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편차, 그리고 문헌학적 관점과 인식론적 관점에 따라서 이 책의 가치는 평가가 완전히 엇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된 소쉬르 원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이 책의 출간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고 역자들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는 데에도 주저할 여지가 없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쉬르 전공자조차 파악하기 쉽지 않은 난해한 내용에 대한 주석이 전혀 없다는 점과 각 장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비롯하여 기존 판본들과의 차별성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없어 이 책의 독서를 안내할 나침판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문헌학적 가치와 이론적 가치로 대별해서 기술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언어의 이중적 본질에 대하여 (불어원본 15쪽부터, 한국어 번역본 35쪽부터. 이하에는 숫자만 명기), 항목과 아포리즘 (89, 135), 일반 언어학에 관한 또 다른 노트(125, 177), 일반 언어학 강의를 위한 예비노트 (283, 377). 그런데 문헌학적 관점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점
이 노출되고 있다. 하나는 문헌의 참신성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편집 분류의 통일성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불어 원본에는 새롭게 발견된 노트 「언어의 이중적 본질」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60년대 말 이래로 소쉬르학의 기념비적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엥글러 교수(2003년 사망)가 출간한 『일반언어학강의 비평본』에 있는 소쉬르의 다른 자필 노트들도 중복 수록돼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엥글러 판본에는 모두 6단으로 이뤄진 페이지 구성 방식 때문에, 소쉬르의 자필 노트가 파편적으로 분산돼 있는 반면, 2002년 갈리마르 판본은 소쉬르의 자필 노트를 한 곳으로 모아서 싣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부  소쉬르 연구의 권위자들은 2002년 불어본이 새롭게 발견된 노트를 제외하고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는 회의적 평가를 내놓고 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원본 전체 분량 360여쪽에서, 새롭게 선을 보인 것은 고작 80쪽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독일 최고의 소쉬르 연구자인 분델리히(Wunderlich)의 평가는 냉혹하다. “이미 60년대부터 소쉬르 주석에 의해서 구축된 것과 관련해 소쉬르의 전문가는 이 책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다.”(Cahiers de Ferdinand de Saussure 58권).

이 책의 문헌학적 가치와 관련된 낙차는 지금까지 나와 있는 유럽어권의 번역 실정을 검토해보면 곧바로 확인된다. 예컨대 원서 전체를 번역한 스페인어본과 달리 생존해 있는 소쉬르학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마우로 교수가 번역·편집한 이탈리아 번역본(2005)에는 새롭게 발견된 문헌과 엥글러가 새롭게 분류한 신항목(Nouveaux Items) 만을 싣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곧바로 던질 물음은 이렇다. 편집자인 부께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책은 소쉬르라는 인물 자체와 그의 사상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네오-소쉬르즘’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인가? 아직 이 문헌에 대한 세밀한 해석을 시도하지 못한 평자는 현재로서 이에 대한 결정적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다만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언어의 이중적 본질」은 소쉬르 언어사상의 심오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인식론적 의의를 갖는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소쉬르 언어 이론에 대한 구조주의의 단순화된 환원적 해석을 비롯해, 반 소쉬르 진영에서 반역사성, 반주체성, 이원주의라는 꼬리표를 붙이며 소쉬르에게 가한 통속적 해석 역시, 이번 책을 통하여 철저하게 재고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될 것이다. 한 예로 그는 공시태와 통시태의 방법론적 조작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20세기 인문학의 정신적 스승답게 ‘언어는 그 존재의 모든 순간에서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도 누누이 강조했다. 또 그는 언어 시스템의 찰나적 본질을 파악하고, status와 motus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 언어의 ‘상태’와 ‘사건’을 구별하고 있거니와, 여기서 말하는 ‘상태’를 부동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일반언어학강의』를 통해서 소쉬르의 명쾌한 논증과 은유에 감동했던 독자라면, 한 고독했던 천재 언어학자가 이번에는 강의라는 형식에 대한 교육적 배려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그리고 미묘하게 언어의 진리에(그는 서론부에서 분명히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대여섯 개의 근본적인 언어학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도달하려는 깊은 사색의 여행에서, 그만의 사유 운동에 배태된 특유의 우회, 망설임, 열림, 이탈 등의 지표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평자는 일전에 이 같은 미완성과 부유(浮遊)함이야말로, 소쉬르 사상의 불멸성을 실현한 추동력이라는 가설을 개진한 바 있다. 또 다른 독서 포인트는 1890년대 초반에 씌어진 이 문헌에서  새롭게 선보인 핵심 술어들(이를테면, 사원수(四元數,
quaternion), 평행관계(parallélité), 추후성찰(postméditation))이 소쉬르 인식론의 또 다른 숨겨진 보물이 될 것이라는 점이며, 더불어 이 책이 15년 후 그가 본격적으로 펼칠 일반 언어학 강의의 발생적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쉬르라는 인문학의 거목에서, 씨앗이 풍성한 열매로 여무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일반언어학노트

시몬 부께·루돌프 엥글러 엮음┃최용호·김현권 옮김┃인간사랑┃458쪽┃2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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