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철 명예교수(원광대 한국문화학과)

민중철학의 태동

한국사상사나 철학사를 논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기간을 사상적 공백기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정말 이 시기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찾아보기 어려운 훌륭한 철학이 대두된 시기라고 생각한다. 우주만유의 근본 문제는 물론이요 특히 억압받는 민중을 대상으로 하여 희망을 노래하고, 주체성을 드러내며, 인간과 생명을 존중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철학사상들이 연이어 출현한 시기였다. 필자는 이러한 철학을 ‘민중철학’이라 불러본다.

이 기간에 많은 민중철학이 대두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崔濟愚 1824~1864)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기반을 둔 신인철학(新人哲學), 증산교 각파의 모체가 되는 증산(甑山 姜一淳 1871~1909)의 해원상생(解寃相生)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대순철학(大巡哲學), 원불교를 창립한 소태산(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의 일원(一圓) 사상에 토대를 둔 일원철학(一圓哲學) 등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신인철학이라는 말은 이돈화가 처음 쓰고 있으나 수운철학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다. 수운의 핵심사상은 천주와 지기(至氣)로 요약된다. 천주는 우주만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개념이요, 지기는 우주의 본질인 동시에 현상의 생멸동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수운의 천주 즉 신은 전 우주를 포용하는 전체를 의미하기에 범재신적(汎在神的)이요 만유신관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천은 바로 인(人)이라 하여 인내천을 강조하고 있다. 인내천이란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새로운 인간의 출현과 그 존엄성을 선포한 철학인 것이다.

대순철학이라는 말은 이정립이 처음 사용하였으나 증산의 철학사상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증산은 원래 옥황상제였는데 많은 신명들이 인류의 구원을 하소연하므로 지상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하다가 이 동토 우리 땅에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났다고 했다. 증산의 사상은 그가 9년간 행한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집약되어 있는데, 그는 옥황제요 미륵불이라는 절대권을 가지고 말세의 운도를 뜯어고치기 위하여 과거의 모든 이념·이법·질서를 개혁 수정했다는 의미다. 이 천지공사의 내용은  해원(解?)·보은(報恩)·상생(相生)·조화(調化)로 요약된다.

일원철학은 원불교사상의 단적인 표현이다. 원불교는 법신불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하고 신앙문에 사은사요 수행문에 삼학팔조를 두어 신앙과 수행을 겸전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소태산은 대각의 첫 소감을 만유가 한 체성, 만법이 한 근원, 생멸 없는 도, 인과보응 되는 이치, 한 두렷한 기틀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이 두렷한 기틀이 바로 일원상이요 이 일원의 진리는 우주만유의 존재와 변화양상에 대한 총체적인 내용이 함유된 철학사상이다.

수운·증산·소태산의 사상 속에는 동양의 유불선 삼교의 주체적 융섭은 물론 서구사상, 더 나아가서는 과학사상까지도 융해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수운은 유(儒)를 체로 하고, 증산은 선(仙)을 체로 하고, 소태산은 불법(佛法)을 체로 하여 과거 종교와 철학사상을 무리 없이 융통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중철학,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 새 세상의 도래에 대한 희망의 철학이다.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이다. 후천개벽이란 우주자연 음양조화의 이법과 운도에 따라 이 세상이 크게 변화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는 선천이었고 돌아오는 세상은 후천인데, 선천은 불평등·부조화 등이 만연한 어둡고 괴로운 시대였으나 후천은 평등·평화가 이뤄져 모두가 잘사는 지상선경이 된다는 것이다. 당시 좌절한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철학이었다.

둘째, 민족의 자긍심을 강조한 주체철학이다. 일종의 선민사상이라 할 수 있다. 수운과 증산은 민족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밀려드는 외세에 강하게 반발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소태산은 외세를 배격하지는 않았지만 이 나라가 장차 크게 문명된 강대국으로 성장하리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에 대한 전망은 세 사람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머지않은 장래에 ‘도덕문명의 지도국’, ‘세계의 종주국’이 된다고 했다. 이 같은 민족주체의식은 우리 국운에 대한 선지자적(先知者的) 예시이기도 했지만 소외당하고 착취당하고 외세에 찌든 민중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주체철학이었다. 

셋째, 인간과 생명을 존중하는 생명철학이다. 이들의 사상에서는 그간의 신 중심 사고가 모두 인간 중심 사상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수운은 시천주 사상을 가르치고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을 제시함으로써 사람이 한울보다 더 귀한 존재가 되게 하고 있다. 증산은 천지공사를 통해 신보다 인간을 더 높여 인간으로 하여금 신명(神明)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신명이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는 인간존엄과 인권회복을 위한 가르침이었다고 생각된다. 소태산 역시 “나의 교법은 인도상 요법(人道上要法)이다”라고 말하고 신통묘술이나 기행이적을 크게 배격, 인도정의를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아울러 이들에게서는 인간 못지않게 모든 생명을 중하게 여기는 생명존중사상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인간학이며 생명의 철학이다.

넷째, 급변하는 사회변동에 대처하는 실천철학이다. 수운은 부패하고 낡은 사회의 변혁을 시도하다가 참수형이라는 탄압을 받았고, 그 뒤 동학의 민중들은 동학혁명, 3·1독립운동, 1920년대의 신문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사회개혁 활동을 전개했다. 증산은 무저항적이고 조용한 사회변혁을 시도했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을 구제키 위한 그의 강렬한 소망은 천지운도와 틀을 바꾸는 천지공사라는 거대한 스케일의 실천으로 이 땅에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했다. 소태산은 현실의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이를 해결키 위한 방법을 하나하나 제자들에게 실현시키며 민중의 힘을 길러나갔다. 그는 병든 인간, 병든 종교, 병든 사회를 정신개혁운동, 자립갱생운동, 생활혁신운동을 통해 개조하고자 했다. 세 사람의 활동은 강한 실천철학을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다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에 민중에게 희망을 주고, 민족의 긍지와 주체성을 드러내며,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존중하고, 사회변동에 따른 강한 실천을 강조했던 수운·증산·소태산의 사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고 더욱더 발전시켜 가야 할 우리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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