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문학평론가)

로마에 이셀이라고 하는 큰 부자가 있었다. 그는 대궐 같은 저택에 3백명이나 되는 학자나 유명인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늘 수많은 책들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들의 저녁식사는 행복한 지식의 성찬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초대한 이셀은 아무런 지식이 없어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그는 노예들을 시켜 그들 각자에게 책 한 권씩을 암기하도록 시켰다. 손님들이 모였을 때 필요할 때마다 노예를 불러 그 책을 암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셀의 ‘살아있는 도서관’은 로마 장안의 화제였다. 어느 날 이 성대한 지식의 성찬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이야기가 나왔다. 이셀은 『일리아드』를 암기한 노예를 불렀으나 어쩐 일인지 그가 보이지 않았다. 심부름꾼이 말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일리아드가 복통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연회장은 폭소의 도가니가 되었다. 노예들은 주인을 ‘대신하여’ 책을 읽었지만, 그로 인한 망신은 온전히 ‘주인’의 것이 되었다.

이 에피소드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불안’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망’의 갈등이 인류의 오랜 딜레마였음을 보여준다. 어린시절 나 또한 그런 불안이 심했다. 고교 시절 속독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읽을 책은 많고 시간은 늘 부족해 선택한 최후의 결단이었다. 5분, 10분, 15분, 20분. 점점 시간을 늘려가며 ‘눈 깜빡이지 않고 한 곳 바라보기’가 속독의 기초훈련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30분 동안 눈을 깜빡이지 않는 데 성공(?)했을 때, 과연 이곳을 계속 다녀야 하는가라는 서글픈 의문이 들었다. 열일곱 살 철부지가 어찌 그런 독한 짓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창피하지만, 그때의 ‘불안’은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던 것 같다. 내 관심의 영역에 들어온 책만을 읽기도 버거웠고, 내 관심 밖의 책을 읽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도 컸다. 최근에 나온 세 권의 책은 이러한 현대인의 ‘비(非)독서의 불안’에 강력하게 호소한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기본 컨셉은 “책은 각기 제 나름으로 훌륭하다. 그러나 책은 하나의 힘찬, 핏기 없는 인생의 대용품에 불과하다”라는 R.L.B. 스티븐슨의 푸념과 맞닿아 있다. 이 책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정독해도 그 책에 대한 말 한 마디 제대로 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공포’를 숙주로 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신간의 존재는 반가움에 앞서 설상가상의 부담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니 말이다. 저자는 다양한 각도에서 ‘비(非)독서의 즐거움’과 그 의외의 유용성(!)에 대한 예찬을 시도한다. 그는 책의 본문을 전혀 읽지 않고, 방대한 책의 제목들만을 가지고 책의 내용과 책들끼리의 다양한 네트워크를 상상하며 행복해 하는, 이상적인(?) 사서(librarian)를 꿈꾼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을 전철에서 읽으며 ‘표지’를 남이 볼까봐 전전긍긍했다. 제목의 선정성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있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줄 수 있을까.

“주변에서 전개되는 책담론이 구체적일 때마다 불안해지는 영혼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안겨주는 문학사회학의 걸작”이라는 찬사도 있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오히려 영혼의 평화를 위협받았다. 소위 지식인 또는 교양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책을 읽지 않고도 그 내용을 능히 파악하는지 아닌지로 구분된다는 주장. 하지만 궁금하다. 책 제목이나 책 날개처럼 아주 축약적인 정보를 통해 책 내용 전체를 ‘상상’하는 것은 ‘책읽기’가 아닌가. 책 제목이나 저자에 대한 정보나 책표지 디자인은 ‘책의 정보’가 아닌가. 그리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또다시 ‘한 권의 책’이라는 물질로 설파하는 저자의 역설은 어떻게 설명할까. 게다가 그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유용성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전거는 하나같이 ‘타인의 책’이다. 무질, 폴 발레리, 발자크, 오스카 와일드에서 소세키, 그레이엄 그린, 움베르토 에코에 이르기까지. 그 또한 ‘이미 읽은 책’으로 ‘아직 읽지 않은, 혹은 영원히 읽지 않을 책’을 설명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이야말로 제목으로 독자의 불안을 ‘낚는’ 것은 아닐까.

‘비독서의 즐거움’을 말하는 이 책에 비해 나머지 두 책은 ‘천천히 읽기의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행간을 읽는 즐거움, 독자가 적극적으로 저자의 사유에 개입하는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독서법은 끊임없이 물음표를 찍는 독서법이다. 어떤 각도에서 새로운 질문을 하는가에 따라 독서의 방식은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책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보다 책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질문을 할 것인가’가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샤오궁의 『열렬한 책읽기』는 독서의 방법이라기보다는 독서의 ‘흔적’을 치열하게 보여준다. 그는 독서의 ‘비결’을 한사코 말하지 않지만 자신이 한 권의 책을 독파할 때마다 어떻게 ‘넘어졌는가’를 무심히 보여준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그에게 저자가 속한 시대 전체와 만나는 일이었으며, 그렇기에 결코 한 줄이라도 허투루 넘어갈 수 없는 사유의 모험이자 자기와의 투쟁이었다. 그는 독서의 쾌락보다 오히려 독서의 고통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독서는 자신의 사유 전체와 저자의 사유가 ‘맞장 뜨는’ 처절한 결투의 장일지도 모른다. 한샤오궁의 책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을 지키는’ 자의 조용한 독백이라 더욱 신뢰가 간다.

아직 나 또한 속독의 유혹, 다독의 매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경험으로부터 얻은 유일한 진실은 나에게 좋은 책일수록 속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진정 아름다운 작품은 요약 불가능하다는 것, 요약형 지식과 축약형 정보는 우리의 삶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 또한 평범한 진실이지만 이 화려한 유비쿼터스의 시대에 잊기 쉬운 진실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빨리 읽히는 책’을 차라리 거부하게 되었다. 우리는 남의 글은 빨리 읽기 바라고 자신의 글은 천천히 읽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진정한 타자를 만나는 길은 ‘소통불가능한 타자의 사유의 문(門)’을 향해 지치지 않고 노크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은 미련하게, 답답하게, 책 한 권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책들은 하나같이 나의 지저분한 메모로 가득 차서 ‘행간’ 자체가 거의 지워질 듯 너덜너덜해졌다. 내 책에 묻은 손때와 그 지저분한 메모들이야말로 대답 없는 타자를 향한 나의 지독한 외사랑의 방식이다. 아직, 내 사랑의 방식은 이렇게 남루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꾀죄죄한’ 사랑의 방식이 속독과 다독을 향한 내 오랜 강박을 치유해주었다는 것이다. 지식의 분량을, 똑똑한 사람의 ‘분위기’를 사랑했던 내가, 이제는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읽지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 피에르 바야르 지음┃김병욱 옮김┃여름언덕┃237쪽┃9천8백원

책을 읽는 방법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김효순 옮김┃문학동네┃217쪽┃1만원

열렬한 책읽기 한샤오궁 지음┃백지운 옮김┃청어람미디어┃455쪽┃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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