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친화력’」 을 통해 괴테와 벤야민, 그리고 이광수 겹쳐읽기

“이 도시를 완전히 불태워버리지 않고는 결코 저는 프라하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프라하의 작가’ 카프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반대로 디킨스는 그가 어릴 적부터 노동하고 활동한 런던에서는 단 한 줄의 글도 못 쓴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튼 이런저런 식으로 많은 작가와 사상가들은 나고 자란 도시의 운명과 하나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보들레르 없는 파리도 생각하기 어렵지만 파리 없는 보들레르 또한 쉽게 상상하기 힘들지 않을까? 그리하여 카프카를 읽은 사람에게 프라하는 영원히 안개 속의 성(城)으로, 즉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게오르크 잠자들이 사는 몽환의 성으로, 그리고 보들레르를 읽은 사람에게 파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땅으로 각인될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의 기억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토리노를 찾아갔다가 중앙역 앞에서 불현듯 마부에게 채찍질당하는 말을 붙잡고 울다가 광기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는 니체를 떠올린 적이 있는데, 이후 이 도시는 내게 니체의 도시로 새롭게 각인된 기억이 새롭다. 이와 비슷하게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베를린의 어린시절』을 번역한 내게 베를린은 무엇보다 먼저 어린시절의 벤야민의 ‘놀이터’이며, 파리 또한 벤야민의 처참한 비극적 운명이 고독하게 상연된 무대에 가깝다. 특히나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는 파리 15구의 동바슬 가(街)는 벤야민이 파리에서 탈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물던 곳이라, 그의 비극적 운명과 그가 추레한 천사의 모습으로 바라본 역사의 비극에 대한 통찰이 각별히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이러던 차에 내가 요즘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글 또한 마침 벤야민적 사유의 진경을 보여주는 「괴테의 ‘친화력’」이다. 이 에세이를 이광수의 『무정』과 겹쳐 읽고 있으니 지금 나는 괴테-벤야민-이광수라는 세 겹의 문화적 상징을 한데 포개어 사유하고 있는 중인 셈이다. 거의 작은 책 한 권 분량에 달하는 이 논문을 이광수의 소설과 겹쳐 읽게 된 것은 벤야민의 비평 대상이 된 괴테의 『친화력』이 이광수의 문제의 소설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홍차와 함께 나온 마들렌 과자 냄새에 이끌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 여행’에 나섰듯, 『친화력』이라는 괴테의 ‘사랑의 운명’ 소설에 대한 벤야민의 빼어난 요리 솜씨는 대학 시절 리포트를 내느라 억지로 읽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소설에 대한 생각을 ‘비의지적으로’ 떠올리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나도 모르게 이 에세이에 그렇게나 매료되었을까? 그것은 아마 이 논문의 마지막에 나오는 “희망은 오직 희망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벤야민에 대한 해석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비평의 소명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발본적으로 전복시킬 수 있는 좋은 화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이론적인 주장보다도 더 유혹적인 이 에세이의 떨칠 수 없는 매력은 진정 벤야민이 어떤 글쟁이인지를 보여주는 그의 글 솜씨이다. 그의 이 에세이가 얼마나 숨 막힐 듯한 매력을 내뿜었는지는 호프만 슈탈 같은 당대의 문장가가 그를 얼마나 치켜세웠는지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 “하나의 비유를 사용해 성장해가는 작품을 불꽃을 튀기며 타오르는 장작으로 간주한다면 그것 앞에 서 있는 주석가는 화학자와 같으며 비평가는 연금술사와 유사하다. 화학자에게는 나무와 타고 남은 재만이 분석 대상인 데 반해 연금술사에게는 불꽃 자체가 생동감 넘치는 수수께끼를 감추고 있다. 이처럼 비평가는 진리를 묻는 존재로, 진리의 살아 있는 불꽃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의 무거운 장작과 체험된 것의 가벼운 재 위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다.”

이광수는 근대란 지정의(知情意)의 세계가 지덕체(智德體)의 세계로 바뀌는 것이라고, 즉 유정에 기반했던 세계가 무정(無情)과 비정(非情)의 세계로 바뀌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 유정을 제도적으로 상징하는 결혼 자체가 유정의 세계를 순수하게 상징하는 사랑을 파괴하며,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법 또한 신화적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결혼은 부르주아 사회의 세포라고 말하지만, 성-사랑-결혼-가족으로 이루어지는 부르주아 사회의 매듭들은 결코 말끔하게 엮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괴테가 평생 연애만 하고 결혼은 그토록 꺼렸던 것이 전혀 우연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처럼 근대 세계라는 것은 사람들의 삶 자체가 사람다운 원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겨우 신화적 폭력에 불과한 법에 허구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위험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란다”고 말하는 횔덜린처럼 희망이 없는 것 속에서의 희망을 말한다. 마치 우리 시대에서의 희망처럼 말이다.


조형준 주간(새물결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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