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안경을 눈에 달고 살았다. 천성이 내성적이고 나다니는 것을 싫어해 방구석에서 책 읽고 텔레비전만 본 탓이었다. 입을 여는 것도 귀찮았던지 남들과 대화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가끔 어머니와 드라마를 보면서 몇 마디 주고받는 게 전부였는데, 안방에 따로 텔레비전이 생기면서 그마나도 뚝 끊겼다.
삭막하던 모자 사이에 다시 활발하게 말이 오고간 때가 있었다. 역시 드라마 덕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잘 만든 작품이었다. 서울 경기 지방에서는 퇴근을 앞당기는 ‘귀가 시계’라고 불렸다지만 가청 지역이 아니었던 내 고향에서는 하교를 앞당기는 ‘귀가 시계’로 통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에 달려가서 케이블 채널을 틀면 화면 가득히 모래가 흐트러지는 시작 장면을 가까스로 볼 수 있었다. 한참 정신을 빼놓고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어머니도 옆에서 화면에 빠져들어 있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자면 열 손가락이 부족할 것 같다. 워낙 대작이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주인공 태수의 손을 붙잡고 절규하던 한 광주 아낙의 대사는 아직까지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다. “선상님은 외지 사람잉께, 살아서 나가주씨오. 나가서 이런 일이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걸 바깥 사람들에게 알려주씨오. 그래야 죽은 사람들이 원통하지 않을 것 아니것소.”

말없이 화면을 지켜보던 어머니에게 정말 그랬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무겁고 낯설었다. 부산 사람은 대부분 몰랐다고.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다들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만 보도했다고. 짧은 대화였지만 쉽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뜻 모를 단어 앞에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신군부, 시민 학살, 군사 독재, 언론 통제, 그리고 땡전 뉴스까지. 다행히 그해 겨울 두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서는 뉴스를 보면서 머릿속 물음표를 조금씩 지워갈 수 있었다.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28년이 흘렀고, 드라마를 통해 그 일을 알게 된 지도 13년이 돼 간다. 대학에 들어온 뒤로는 여러 참고자료와 주변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참상과 인권 유린을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됐다. 그렇지만 여전히 ‘5·18’하면 13년 전 봤던 드라마 대사가 먼저 떠오른다. 바깥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달라며 절규하던 아낙의 모습은 암울했던 언론 통제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이기에 마음이 쓰라리다.

쓰라린 마음이 더욱 아픈 것은, 요즘 들어 자꾸 귀에 들어오는 이상한 소식들 때문이다. 포털 사이트 댓글이 사라지고 검색 순위가 뒤바뀌었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정부 인사가 의도적으로 언론 편가르기를 부추긴다는 말들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그저 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공영방송 감사를 보니 더 이상 흘려들을 일이 아닌 것 같다. 설마 28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헛된 망상을 품고 있는 걸까.

문득 『로마인 이야기』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그러나 무릇 지도자라면 보기 싫은 현실도 볼 줄 알아야 한다.” 여러모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세상에는 보기 싫고 듣기 거북한 것을 참아야 하는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 수 없는 천성이라면 애시당초 그 자리에 앉지 말았어야 했다.

세상은 변했고, 역사의 모래시계는 다시 뒤집어 놓을 수 없다. 고향의 어머니도 아는 사실을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이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12살 꼬마처럼 방구석에서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보려는 심보인지. 다 큰 어른들의 철없는 향수 앞에서 내내 마음이 착잡해지는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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