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대학신문 사진부
최근 한국문학작품들에서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무력화하는 환상을 만들어내 현실에서 이탈하려는 욕망이 자주 나타난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씨는 2000년 이후 문학 속 주인공들을 ‘냉소를 탑재한 경제적 주체’라고 평했다. 실제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백영옥의 『스타일』, 이외수의 『하악하악』 등의 작품에는 자본주의 문화를 냉소적으로 수용하는 글귀가 많다. 물론 이 작품들이 꼼꼼하게 세태를 재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개 냉소적인 체념에 머무는 모습을 보인다.

소위 ‘잘 팔리는’ 문학이 현실과 괴리돼 있다는 지적 속에서 ‘불온서적’은 되려 빛을 발하고 있다. 유신독재에 맞서 싸운 김남주 시인의 생애를 다룬 『김남주 평전』, 삼성그룹이 어떻게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 분석한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등 지난 7월 국방부가 불온서적으로 분류한 책들을 살펴보면 부조리한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불온서적에는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르포의 정신이 깔려 있다. ‘르포’의 사회비판정신과 ‘문학’의 예술성을 동시에 확보하고자 하는 르포문학은 한때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르포문학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현실과 직접 맞부딪치는 문학은 여전히 필요한데, 그 많던 르포문학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국 르포문학의 시발점

국내 르포문학의 출발점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부독재 시절 경제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억압, 인권침해 등의 범죄가 비일비재하게 자행됐지만, 언론은 통제되고 진실은 은폐됐다. 자연히 새로운 정보원인 르포문학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커졌고, 작가들은 앞장서서 르포문학작품을 썼다.

작가들은 당시 한국사회의 현실을 밀착 취재해 독자들에게 ‘진실’을 알렸다. 방현석 작가는 『새벽 출정』 등에서 현실을 단순화하지 않는 실감 있는 묘사로 당시 노동자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그려냈고 박태순 작가는 『밤길의 사람들』에서 1987년 6월 항쟁을 파헤쳤다.

주춤거리고 있는 르포문학

1980년대에 성행했던 르포문학은 현재 주춤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주요 일간지에서 르포기사는 거의 사라졌고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르포소설은 잘 보이지 않는다. 00학번 이후 세대들은 르포문학을 모르고, 80학번 세대들의 기억에서 르포문학은 잊혔다. 르포문학은 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일까.

그 이유로 르포문학이 문학의 목표 중 하나인 대중과의 접점 찾기에 실패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르포작가 김순천씨는 “르포문학은 대개 소외된 계층의 이야기를 쓰기 때문에 국민 다수인 중산층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이후 대중의 취향은 개인주의적으로 변했지만 르포문학은 여전히 사회문제에 집중해 대중의 관심분야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민음사는 지난 2005년까지 문학, 전기, 휴먼 다큐멘터리 등 각 부문별로 ‘올해의 논픽션상’을 시행해왔다. 지난 2003년 올해의 논픽션상 대상을 수상한 『상하이 올드 데이스』 등의 르포문학은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판매 면에서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민음사 편집부 양희정 차장은 “르포문학의 전통이 오래된 유럽과 달리 우리사회에서는 르포문학에 대한 관심이 아직 저조하다”며 “저변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지만 문학상 시상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언론사에서 르포관련 지면을 줄인 것도 한 원인으로 지목받는다. 르포작가 유재순씨는 르포작품을 30편 정도 준비해 놓았지만 실어 줄 신문사가 없어 발표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현재 국내가 아닌 일본에서 활동 중이다. ‘한겨레21 르포상’을 담당하는 유현산 팀장은 “대중의 눈길을 끄는 짧은 기사나 자극적인 칼럼이 팔리는 시대에 호흡이 긴 르포는 독자의 관심 밖”이라고 말했다.

르포문학은 아직도 유효하다

인터넷 매체의 발달로 정보의 양은 많아졌고, 전달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르포작가 김하경씨는 이런 시기일수록 르포문학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시, 소설은 작품을 완성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현실변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반면 신문, 방송은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지만 다양하고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하지 못한다. 때문에 문학과 저널리즘의 중간 형태인 르포문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설명했다.르포작가들은 르포문학이 한국문학의 편향성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김순천 작가는 “현재 한국문단에서는 새로운 발상이 이뤄지지 못하고 기존권력이 재생산되고 있을 뿐”이라며 “이대로는 문학이 대중으로부터 더 멀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국문단이 SF, 르포 등 새로운 장르를 개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학은 언어의 아름다움을 세공해야 하지만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필요도 있다. 르포작가들은 현실의 최전선에서 말과 글을 빌려 칼보다 강한 펜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현실주의 작가 네트워크 ‘리얼리스트 100’의 회원들은 “르포문학은 개인적인 삶에 머무르기보다 사회적인 삶을 보여준다”며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인 타인을 돌아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르포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한국작가회의, ‘리얼리스트 100’, 문화연대는 지난 1월 23일 대운하 답사기획을 통해 운하 건설의 폐해를 알리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김하돈, 안재성, 박일환 등의 작가들은 한반도 운하 예정지를 답사하며 훼손 위기에 처한 지역의 자연을 르포문학에 담았다.

조타수를 재조정하는 르포문학

최근 르포문학에 대한 언론계와 출판사의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어 다행스럽다. 「한겨레21」은 르포작품을 연재하고 있고, 출판사 후마니타스는 최근 이랜드 노조원들이 쓴 르포집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를 출간했다. 후마니타스 안중철 편집장은 “노동현안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르포형식을 택했다”며 “앞으로 사회과학이론서와 함께 노동문제와 관련된 책을 지속적으로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언론사, 출판계의 지원보다 중요한 것은 르포작품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이다. 르포적인 상상력을 키워주고 이를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환경이 필요하지만 르포문학에 대한 관심과 교육 모두 부족하다. 지난 2003년부터 르포문학교실을 개최해 르포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삶이 보이는 창’은 르포문학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아직은 스스로를 동호회 수준이라 평하지만 그들은 부족한 필력을 열정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이 모임은 청계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마지막 공간』,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를 기록한 『부서진 미래』를 펴내기도 했다.

르포작가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해 신설된 ‘한겨레21 르포상’은 1회 수상작이 나오지 않았다. 유현산 팀장은 “1회 때는 출품작도 적었고 작품의 질도 좋지 않았다”며 “르포형식을 오해해 신변잡기적인 수필이 대다수를 이뤘다”고 말했다. 민음사 편집부 양희정 차장 또한 “실력있는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논픽션상을 만들었지만 소수를 제외하고는 작품의 질이 좋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르포문학 자체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 김하경 작가는 개인의 삶에 주목하는 르포 글쓰기를 제안했다. 그는 “1980년대에는 노동, 인권 등 사회문제를 먼저 설정해놓고 개인들을 배치했다면 이제는 개인의 삶이 먼저 설정되고 다양한 사회문제가 얽혀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김순천 작가는 “사회가 1980년대보다 중층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르포문학도 단순한 형태가 아닌 복잡한 형태로 현실을 보여줘야 하는데 자기변신과정이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르포문학의 계층범위를 노동자층에서 확대할 필요도 있다. 김순천 작가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임시직 노동자, 기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해 쓴 『세계의 비참』을 그 사례로 들었다. 그는 “『세계의 비참』이 일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고통을 섬세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중층적인 일상의 복잡함을 뚫고 세계를 새롭게 재해석한 깊은 시선 덕분”이라며 “오늘날의 르포문학은 이런 시선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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