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로 돈을 벌려는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듯하다. 1927년에 발행된 한 잡지에는 벌거숭이 남녀사진이란 글이 실려 있다. 당시 신문에는 누드 사진을 판다는 일본인들의 광고가 많았던 모양이다. 이 글은 그러한 광고가 대부분 사기임을 지적하며,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 벌거벗은 남녀 야사(夜事)하는 사진이라는 제목 아래 구십 노인도 이것을 보고 흥분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인생 지락(至樂)이라는 현란한 광고 문구를 보고 일본으로 돈을 보냈더니, 남녀 노동자들이 더운 여름날 밤늦게까지 웃통을 벗은 채 땀흘리며 일하고 있는 사진이 왔더라는 것이다. 사진 옆에는 젊은 기운으로 주야로 열심히 일하며 직업에 충실한 것이 인생의 지락(至樂)이 아니겠느냐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통해 온갖 포르노물이 범람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포르노물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근처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파는 상인들 중에는 윗 글에 소개된 일본 상인들처럼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야한 것이라는 말에 비싼 돈을 들여 샀더니, 엉뚱한 내용이더라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사기를 당했다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어 난감하기는 1920년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누드가 아닌 것을 누드라고 속여 팔아도 별 탈은 없었다. 

그러나 상품화된 누드를 누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얼마 전 온 나라를 들끓게 한 이승연 파문에 대해 제작사는 상업적 의도로 만든 누드집이 아니라며 공개시사회를 제안해 또 한번 지탄을 받았다. 그런데 인터넷 토론 게시판을 보니, 이승연 파문이 언론에 의해 마녀사냥으로 흐르고 있다는 지적 또한 적지 않았다. 일본군 성 노예 문제에 전혀 관심도 없던 언론이 이번 사건을 부풀려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상품화하면서 이승연을 국민의 공적(公敵)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파문을 둘러싼 논쟁을 계기로 역사와 성의 상품화, 예술과 외설의 경계, 표현의 자유, 민족주의, 연예인의 사회적 책임감, 언론의 선정적 보도 등에 관한 논의가 한층 심화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역사의 상처로 남아 있는 문제에 접근하면서 그 역사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한 배려를 생략하고 사회적 파장에 대해 신중하게 고려하지 못한 몰역사적 행태는 비판해야 마땅하다. 그러한 몰역사적 행태가 표면화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지난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대한 반성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 수치스러운 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이 만신창이가 된 채 통과되는 현실이 계속되는 한, 또 다른 역사가 상품화된 누드의 옷을 입고 누드가 아니라고 우기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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