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소설가 김경욱

 

실연의 아픔 이후 글쓰기를 시작해
세상을 ‘읽는’ 김경욱에게 소설이란 질문의 양식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으니까요”

 

“만일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베티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리고 내일 지구가 멸망하지 않더라도 나는 베티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베티를 만나러 갈 것이다.” (『베티를 만나러 가다』 ‘작가의 말’에서)

그리하여 김경욱 작가를 만나러 갔다. 지난 23일(화) 김경욱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집 『위험한 독서』가 출간됐다. 막 나온 따끈한 책을 빨려들 듯 읽고 남은 여운을 챙겨 그를 만나러 갔다.
지적이고 세련된 그의 첫인상은 영화 「모던보이」의 박해일을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그는 전날밤의 늦은 술자리 때문에 노곤해 보였다. 더구나 김 작가는 자신을 ‘말하기보다 듣는 편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막상 말문을 연 그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로빈 윌리엄스처럼 온화한 교수의 모습이었다. 소설가 최재경씨는 그를 ‘황백당(黃白糖)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직접 만나보니 납득이 갔다. 첫인상은 깔끔한 백설탕 같아 보였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수차례의 정제과정을 거친 황설탕처럼 원숙한 그의 성품을 느낄 수 있었다.

“초보적인 독자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 중 하나는 책의 주인공과 저자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위험한 독서」에서)

책을 통해 저자를 유추하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겠지만, 김경욱 작가의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대부분 주인공이 곧 저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등단작 「아웃사이더」를 비롯해 『아크로폴리스』 등의 소설은 1인칭 시점의 고백체를 사용하고 있다. 현실과 똑같은 지명, 가령 녹두거리나 자하연 등은 서울대 인문대 출신의 저자가 소설의 주인공일 것이라는 심증을 더 굳건하게 만든다. ‘초보적인 독자들의 선입견’으로 치부하기엔 김 작가는 증거가 여실히 드러난 피고인이다. 김경욱 작가는 “소설에서 당시 대학생활 때 분위기를 표현했던 것 같다”며 “젊은 시절 소설가는 자기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된다”고 변론했다.
“그 무렵 그의 마음은 지옥이었다. 실연의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희미해지지 않았고 스스로 지쳐버린 스물둘의 몸과 마음은 그 어떤 위안도 구하지 못했다.” (「미림아트시네마」에서)

자전소설 「미림아트시네마」가 알려주듯 ‘실연’은 그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다.
“그때 실연의 아픔, 낯선 서울생활에 대한 적응 등 여러 문제로 힘들었죠. 우연히 문방구에 들어가 펜과 노트를 샀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글을 쓰고 있더라고요. 내면의 자신이 ‘글쓰기’라는 답을 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느라 집 밖에 나가는 일이 드물어 별명도 ‘암굴왕(巖窟王)’이다.

“언제부턴가 모든 게 책으로 보여. 모든 게 책으로 보이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읽는다.” (『위험한 독서』 ‘작가의 말’에서)

김경욱의 소설을 관통하는 화두는 ‘텍스트’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영화를 읽고,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는 음악을 읽고, 최근 장편 『천년의 왕국』은 역사를 읽고 쓴 작품들이다.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인 「위험한 독서」는 ‘모든 게 책으로 보인다’는 그의 고백처럼, 책을 읽고 쓴 작품이다. “장편소설을 쓸 생각인데 요즘 아이디어를 찾고 있는 중이죠.” 최근 그는 니체 전집과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읽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씨가 김경욱씨를 ‘젊은 영화도상학자’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의 소설에는 영화나 음악과 관련된 비유가 자주 등장한다. 비유는 세계를 보는 방식이라고 일컬어지는데, 그는 주로 대중문화에서 세계를 읽고 있는 듯하다. “소설은 당대 욕망의 해석이라고 생각해요. 대중문화야말로 당대 대중의 욕망이 집결되는 곳이죠.”

“당연히, 이것은 작품(work)이 아니라 텍스트(text)다.” (『황금사과』에서)

이제까지 김경욱 작가의 소설을 ‘작품’이라 불렀다면 이제는 ‘텍스트’라 명명해야 할 것이다. ‘기승전결’의 형식적 완결성을 갖춘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김경욱의 소설은 낯설다. 그의 소설은 ‘전’에서 ‘결’로 넘어가려 할 때 끝나는, 뒷이야기가 더 궁금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위험한 독서」에서 독서치료사인 주인공은 환자인 ‘당신’을 치료해준다. 그는 점점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되지만 치료가 끝나자 그녀는 떠나버린다. 그는 그녀의 홈페이지를 드나들며 근황을 살핀다. 하지만 지금은 ‘최근 2주간 새 게시물이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남아 있다.
‘그는 그녀를 만나러 갈 것인가, 만나러 갔다면 그녀는 고백을 받아줄 것인가’ 등 뒷이야기가 더 재미있을 법도 한데 소설은 바로 그 앞에서 멈춘다. ‘결’이 생략된 소설 구성방식은 그의 소설관과 맞닿아 있다.
“소설이란 본질적으로 질문의 양식이라 할 수 있죠.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불러오게 마련이고,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아 다른 텍스트를 향해 열려 있죠. 작품은 단일한 의미를 갖는 닫힌 완결체지만, 텍스트는 독자가 질문함으로써 직접 의미를 부여해 완성하는 것이죠. 독자가 질문할 장을 만들어놓고 직접 결말을 쓸 수 있게 하는 소설을 좋아해요. 소설은 독자에게 끊임없이 세상에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비로소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으니까요.”
‘주인공과 저자를 동일시하는 것을 초보적인 독자의 선입견’이라 말한 것도 텍스트를 작가의 이야기로 한정하지 말고 독자가 직접 작가가 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하길 바란다는 의미에서다. 『아크로폴리스』, 『모리슨 호텔』 등에서 소설이 곧 자신의 이야기처럼 보였던 피고인은 『위험한 독서』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한 셈이다. 고백체 소설에서 보였던 주관화되고 고립된 ‘나’는 『위험한 독서』에서 세계를 향해 눈을 돌린다. 그의 소설은 확실히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번에는 당신이 읽을 차례야. 나를 읽어봐. 당신의 독서를 위해서라면 나는 스스로 책이 되는 위험을 무릅쓸 수도 있으니까. 당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위험해지는 것뿐이니까.” (『위험한 독서』 ‘작가의 말’에서)

그의 신간 소설집은 따끈한 온기가 채 가시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새로운 그가 읽고 싶어진다. 김경욱 작가의 애독자로서 그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여전히 나의 책이니 강의를 하거나 지인을 만나 술자리를 갖느라 바쁘더라도 당신을 쓰는 데 게을리 하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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