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연 사회부장
47년 전 어느 겨울날. 이태원 산동네 쪽방. 종이를 들고 있는 왜소한 청년이 보인다. 그가 들고 있는 종이는 고려대 합격증. 헌책과 밤낮으로 씨름한 끝에 얻은 합격증이다. 하지만 청년의 표정은 너무나도 우울하다. 청년은 한숨을 내쉰다. 합격을 했는데 뭐가 그리 우울한 걸까. 이유는 하나다. 등록금이 없어서.

김밥, 풀빵, 아이스케키를 팔며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한 그였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는 결코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고려대 합격증. 하지만 등록금이 없다. 청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왜 가난한가. 가난하면 왜 공부를 할 수 없는가. 등록금은 왜 이리 비싸 가난한 이들을 가로막는가.

가난해서, 등록금을 낼 수 없어 대학의 꿈을 포기할 뻔한 이 청년에게 작은 기적이 일어난다. 이태원 재래시장 상인들이 등록금을 마련해 준 것이다.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우리 같은 서민들을 위해 반드시 ‘큰 일’을 할 거라고. 가난한 상인들이 건넨 이 작은 기적으로 청년은 절망에서 벗어난다.

그로부터 46년 후. 놀랍게도 이 청년은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가 되어 있었다. 그는 호소했다. “나는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난의 고통을 뼈저리게 안다.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반드시 서민들이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는 정책을 펼치겠다.” 서민들은 그를 믿었다. 달동네 청년에서 신화의 주인공이 된 그의 인생처럼, 그가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고. 그는 결국 이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됐다.

그를 대학에 보내 준 것은 가난한 서민들이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것도 가난한 서민들이었다. 가난한 서민들은 믿었다. 이제 그가 우리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일해 줄 차례라고. 하지만 이상하다. 가난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청년이 대통령이 되었건만, 그리고 그 대통령이 서민들에게 더 나은 생활을 약속했건만, 가난한 이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종부세 폐지와 같이, 가난과 거리가 먼 이들을 위한 정책은 눈에 띄는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대통령이 젊은 시절 겪었던 절망스러운 기억인 대학 등록금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것이 의아하다. 

한 달 전 어느 대학의 개강날. 전북의 한 지방대. 종이를 들고 있는 한 청년이 보인다. 그가 들고 있는 종이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마련 못해 먼저 간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청년은 공연연습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대통령은 이 소식을 들었을까? 들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난 9일 열렸던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나는 반값 등록금 공약을 한 적이 없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제 대학 등록금 문제는 그의 관심사를 떠난, 47년 전 작은 기적에 의해 해결된 아련한 추억의 한 조각에 불과한 문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지 걱정된다.

시민단체 ‘등록금넷’에 따르면 일부 사립대들은 수입․지출 예산을 뻥튀기해 1조원이 넘는 차익을 남기고 있다. 국립대의 경우도 기성회비를 교직원 급여성 수당과 소모성 경비 등에 부당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문제들만 바로 잡아도 등록금을 15~20% 인하할 수 있다고 한다. 등록금 문제는 정부와 학교 당국의 의지만 있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대통령에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던 지난 시절의 아픈 기억을 떠올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일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등록금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가난한 서민들을 생각해 달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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