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가 쓴 『처녀들, 자살하다』는 한 가정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가식과 허위 의식에 억압당하던 다섯 명의 소녀들이 차례로 자살하는 내용을 다룬 소설이다. 자살을 다루었으니 비극적이고 암울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고 유쾌하며 따뜻한 작품이다.

자살한 다섯 소녀의 이웃집에 한 할머니가 산다. 그 할머니는 소녀들의 아버지가 딸들의 죽음 이후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전구를 매다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는다. 그의 손자 디모는 친구들에게 할머니의 행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그리스인은 우울한 민족이야. 그래서 자살은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딸이 자살했는데 크리스마스 전구를 단다는 거, 그건 말이 안 돼. 우리 할머니가 미국 사람들을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왜 그렇게 항상 행복한 척하는가였어.”

전구는 집 안을 색색으로 물들일 것이다. 바깥에서 보면 아름답게 빛이 나고, 어쩌면 다른 어느 집보다 따뜻하고 포근해 보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죽은 딸들의 아버지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구를 매단다. 행복은 소모품에 불과한 전구로 가장되어 있다.

굳이 미국 사람들이라고 단서를 달아 놓았지만, 나는 이걸 ‘우리는’이라는 일반화된 주어로 이해했다. 우리는 항상 왜 그렇게 행복한 척하는가. 혹은 행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행복하지 못한 순간을 모두 불행으로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행복한 순간과 그렇지 않은 무수한 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행복한 소수의 순간’과 ‘불행한 다수의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행은 전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탓이다. 불행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행복해야만 한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벨평화상을 받을 것도 아닌데 행복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각종 매체를 통해 행복의 형태를 광고해야만 한다. 이런 지경이니, 행복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강박이다.

인류학자이자 고고학자인 로렌 아이슬리가 그의 자서전 『그 모든 낯선 시간들』에서 쓴 것처럼, 행복이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들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비장해두었다가 시절이 절망적일 때 꺼내볼 수’ 있는 순간이며, ‘과거도 미래도 욕망도 전혀 없는 철새’와 같은 찰나적인 순간이다.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행복을 느끼는 것에 인색하건 관대하건 상관없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알아차리는 것이다.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관통해 지나가는 그 순간을. 누구도 몇 년, 몇 월, 어느 날 오후에 그 순간이 통과할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으니까.

행복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할 수 없다. 노력해서까지 획득해야 하는 게 행복이라면, 현재를 유보해야 얻을 수 있는 행복이라면 행복하지 않는 게 낫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행복에 대해 전전긍긍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그 순간 삶을 관통하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 중 하나가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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