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안하영 기자
도시 지역 및 국가 구성원으로서 정치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 주체. 위키백과사전에 나온 ‘시민’에 대한 정의다. 오늘날 시민은 국민국가의 구성원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산업혁명 당시에는 유산계급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됐다. 인문·사회과학의 개념은 역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사회제도에 따라 달리 정의된다. 한림대 한림과학원 김용구 원장은 “개념은 장소(토포스)와 시간(템포)에 따라 그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개념사 연구는 개념의 역사를 추적해 기원을 살펴보고, 개념을 매개로 정치·사회의 전개과정을 분석한다. 개념은 정치사회의 구체적 변화를 반영하는 치열한 사고과정의 산물이고 개념사는 실증적 정치사회 분석과 사상사적 분석의 매개체다.

◇‘근대’에서 벌이는 ‘개념의 싸움’=한림과학원은 지난 2005년부터 ‘한국 개념사 사전’을 편찬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오수창 교수(한림대·사학과), 송호근 교수(사회학과)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참여해 총 50개 항목으로 집필할 계획이며 2015년에 완료할 예정이다. 지난 9월에는 ‘한국 개념사 총서’의 1권으로 김용구 원장의 『만국공법』이 출간된 바 있다. 이 용어는 일본 학계의 용어 ‘국제법’에 밀려 지금은 쓰이지 않고 있다.

현재 7차례 진행된 워크숍에서는 시장, 민족, 국가, 주권, 시민, 헌법 등의 용어가 선정됐다. 이들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갈 때 생성된 개념으로서 근대를 규정짓는 핵심 용어다. 박명규 교수(사회학과)는 “개념사 연구는 근대를 거쳐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게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등 근대의 문화적 성격을 밝히려는 성격을 띠고 있다”며 “개념사의 문제의식은 ‘근대를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와 관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19세기 말은 고유한 언어, 사상이 서구문물과 만나면서 ‘개념의 싸움’을 벌이던 시기다. 전근대와 근대가 만나면서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지던 19세기 말은 개념사의 관건이 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한국 개념사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유럽에서의 개념사 연구는 통시적, 공시적 관점에서 ‘개념의 전이’를 주로 다루지만 한국에서는 ‘개념의 충돌’도 주 연구대상이다. ‘시민’ 역시 한국에서는 한자문명권, 한국의 특수성 등의 맥락에서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된다. 박명규 교수는 「한국 개념사 연구의 논리와 방법」에서 우리만의 맥락으로 시민의 개념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시대 ‘시민’은 ‘시(市, 시장을 뜻하는 한자)’와 ‘민(民)’의 합성어로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시민’은 자유로운 도시주민을 의미했는데, 도시행정의 개편과 더불어 ‘시의 주민’이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헤겔 철학 및 마르크스주의가 소개되면서 ‘시민’은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입되던 서구사상이 서구에서 한국으로 직접 들어오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실제로 1990년대 초에 언급된 ‘시민’은 일본의 시민론을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박명규 교수는 “한국의 개념사를 연구할 때는 서구 개념이 동아시아에 전파된 과정, 한자문명권 내에서 일어나는 개념의 충돌, 일본의 식민 과정에서 나타난 서구사상의 굴절, 서구사상의 직수입 등의 과정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보편과 특수, 두 마리 토끼 잡기=“피레네 산맥 이편에서는 진리, 저편에서는 오류.”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대다수 서양에서 탄생, 정리된 개념이다. 서양의 개념은 비서양에 수용되면서 기존의 개념과 충돌해 서로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같은 용어라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용어를 사용할 때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개념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개념사 연구는 비교문화적 관점을 통해 학문이나 사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강상규 교수(한국방송통신대·일본학과)는 “세계사적 개념과 동아시아적 특수성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며 “보편과 특수의 접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칫 맥락을 놓치면 용어가 보편적 개념으로만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과 특수의 경계에 위치한 개념사 연구는 동양의 학문을 오리엔탈리즘으로 격하하는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고, 한국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강 교수는 “개념사를 통해 구체적 맥락을 파악할 때 이 땅의 고민이 묻어나는 학문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념사, ‘동아시아’를 외치다=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와 동북아역사재단 등 4개 단체가 공동주최한 제11회 개념사국제학술대회가 지난 9월에 개최됐다. ‘서구 개념의 지구적-역사적 전파와 동북아시아 지역질서의 변환’을 주제로 유럽, 아시아 등의 학자들은 서구 개념이 아시아 지역으로 어떻게 전파됐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의했다.

리디아 류 석좌교수(미국 컬럼비아대·인문대)는 ‘제국주의 전쟁에 있어서 상처에 대한 담론’을 주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개념을 정의해 타국을 침략했는지 분석했고, 사다미 스즈키 박사(일본 국제일본연구센터)는 ‘메이지유신기 자유와 평등의 개념에 대하여’를 주제로 일본에서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한국의 개념사가 동아시아의 개념사, 세계적 개념사와 함께 논의된 것이다.

지난해 인문한국지원사업에서 인문분야 중형 연구소로 선정된 한림과학원은 근대 이후 개념들이 동아시아 각국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소통 가능성을 넓히고자 ‘동아시아 기본개념의 상호소통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한림과학원은 ‘18세기 시(時)와 속(俗) 관련 용어의 변화와 의미’, ‘대립개념과 연관개념을 통해 추적한 문명개념의 변천과정-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등 다양한 주제로 월례발표회의를 열고 있다.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와 현대문제를 연구하는 동아시아학술원도 ‘동아시아 개념사의 가능성 모색’을 주제로 지난달 10일 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민병희 연구원(동아시아학술원)은 ‘동아시아에서의 개념사 연구문제에 대하여’를 주제로 유럽 개념사와 동아시아 개념사를 비교 분석했다.

◇개념사, 아직은 초보운전 중=연구자들은 한국의 개념사 연구가 첫발을 내딛는 단계라고 입을 모은다. 강 교수는 “현재 사회 근간을 이루는 용어를 우선 연구하고 있다”며 “협의를 통해 용어를 확대, 선정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개념사 연구를 위해서는 서양의 정치사상 및 동아시아의 논의와 더불어 한국의 논의를 함께 파악하고 비교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학제 연구가 필수적이다. 최근 여러 학술대회에서 연구자들의 협의가 이뤄지는 점은 기대해볼 만하다.

이제 막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개념사 연구는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박명규 교수는 그중에서도 사전편찬 작업을 첫손으로 꼽았다. 그는 “어휘사전이 주를 이루는 우리나라는 정교하고 체계적인 사전이 부족하다”며 “어휘에 대한 용례 사전이 발전해야 사전적인 정의를 기초로 연구가 진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시점에 서울대 역사연구소 주도로 진행 중인 ‘역사용어사전’ 편찬 작업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최근 연구는 한자개념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자어가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만들어졌고, 번역·수입됐는지 등 어휘의 연속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자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개념사는 학문을 위한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연구라 할 수 있다. 깊이 있는 학문을 하려면 개념 자체가 명확히 정립돼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개념사를 ‘학문의 얼굴’이라고 일컫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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