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논다. 노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항상 복수의 사람이 놀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가 성립된다. 놀이는 집단을 배경으로 하기에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때로는 사람과 도깨비가 함께 논다. 도깨비와 놀아본 사람은 놀이의 경지를 아는 사람이다. 잘 노는 사람을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땅에는 도깨비와 놀았던 놀이도사들이 살았었다. 나는 한동안 도깨비 소리를 듣지 못해 섭섭했다. 그런데 어느 날 TV에 도깨비가 나타났다. 천하장사를 마다하고 놀이도사가 된 강호동. 그는 현대판 도깨비다. 코미디다 개그맨이다 ‘웃찾사’다라고들 하지만 강호동, 그는 코미디와 개그의 영역을 뛰어 넘은 펀메이커(funmaker, 재미쟁이)다. 우리의 지루한 삶에 시원한 재미를 안겨주는 그를 펀메이커라 불러줘야 한다.

베블렌의 『유한계급론』은 서양 자본주의가 만든 유한계급의 ‘여가’에 대해 냉소적 입장으로 정리한 저서다. 그는 엘리트 중심주의와 여가가 결합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베블렌의 이론을 지금 이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가능한가? 지금은 엘리트 중심 사회가 아닌 대중(시민)이 중심이다. 평등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동일한 모습을 갖추지 않는 것은 공격 대상이 된다. 놀이라는 사회문화적 현상도 동일한 틀과 관점 속에서 이해되기를 요구한다.

즉 엘리트를 위한 놀이로부터 시민을 위한 놀이로의 진화과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고종과 관련된 일화다. 선교사와 고빙들이 연식정구를 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고종은 “왜 저렇게 땀을 흘리며 고생을 하나? 하인들 시키면 될 일을”이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이 일화의 배경에 얽힌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고 싶다. 하나는 놀이의 주체와 관련된 역사적 인식의 문제다. 「후한서 위지동이전」에 기록된 바, 동이를 향한 중국인들의 평가는 한마디로 ‘能歌善舞’였다. 오늘날 표현으로는 “한국 사람들은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잘 놀던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놀 줄 모르게 된 역사적 과정은 “쌍것들이나 노는 것이지”라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지배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생활방식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사람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뱃내짓’이라는 놀이를 할 만큼 삶의 본질이 놀이다. 사람들은 하루에 두세 시간만 일을 하고 수면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모두 모여 논다. 노는데도 에너지가 소진된다. 따라서 삶의 에너지 분배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제대로 사는 생활방식은 ‘일하고-쉬고-놀고’의 세 박자 형태다. 그런데 ‘일하고-놀고-일하고-놀고’의 두 박자 방식을 기본으로 하는 노예적 노동형태로 변한 문제가 있다. 두 박자 삶의 끝은 에너지 소진에 의한 죽음이다. ‘놀고’와 ‘쉬고’ 사이의 혼동으로 인해 일하지 않는 상태는 ‘논다’라고 표현한다. 일하지 않는 상태는 쉬는 상태 혹은 노는 상태일 수도 있다. ‘논다’를 한 발짝 더 진행시킨 것이 관광이고 ‘쉰다’를 규격화한 것이 휴양이다. 양자를 혼동하는 현재의 사회풍속도를 보는 것 같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은 전혀 다른 사회적 현상이고 쉬는 것은 에너지의 재충전을 위함인데 비해 노는 것은 에너지의 소진에 기여하는 현상이다. 쉬지 않고 놀다 보니 모두 죽는다.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최고를 기록하는 한국은 쉴 줄 모르는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에 미친 사람들이 갈 길은 멀다. 놀기도 해야 하고, 쉬기도 해야 한다. 도깨비 같은 강호동에게만 매달리지 말고 스스로 노는 법을 터득하고 쉬는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놀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고, 쉬지 않으면 죽는다.

전경수 교수 
사회대 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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