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희구가 담긴 형용사
법은 형용사적 의식의 산물
법의 꿈이 담긴 형용사 빚어내
진정한 법치주의 구현해야

법학부 석사과정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명사가 아니다. 조사 ‘의’이며, 더 나아가 형용사다. 명사에 대해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그 중 두드러진 것은 명사가 품고 있는 개념의 추상성이다. 명사와 더불어 수많은 규정과 설명, 그리고 근거를 동시에 가르치고 배우지만 경험과 감정 그리고 희망과 기대가 섞이지 않으면‘참다운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꿈은 명사지만 그 앞에 개개인의 소망과 희구에 따라서 형용사가 동반되고 곧이어 변한다. 꿈은 이미 꿈 꿀 권리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은 무엇을 말하고 있고,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법은 보통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실체적으로도 그 이름의 내용까지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법은 항시 외적 대상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무엇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법이나 ‘좋은’ 법을 이야기하지 ‘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법이라는 명사는 자족적이어서, 어떤 형용사도 불요하다고 선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지고지순하게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법과 원칙’을 말하고 강조함으로써,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선언한다. 법은 형용사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우리는 법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고 다듬을 필요도, 풍부히 할 노력도 요구되지 않는다. ‘법과 원칙’을 말하는 사람들은 법의 꿈을 전파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꿈이 법을 통해 실현되고 더 나아가 그 법에 그들 아닌 모든 사람들이 복종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법과 원칙’은 인민들의 의지도 될 수 없고 민주주의적 절차로서 기능하지도 않는다.

명사의 추상적 내용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자본주의적 신용의 매체인 법이 자유로운 사적 자치와 공정한 거래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려면 명사에 대해 자신의 형용사를 덧붙일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만 한다. 형용사는 오로지 뼈만 앙상한 명사의 운명에 뜨거운 피와 살갗을 입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또한 형용사는 ‘나와 너’가 명사를 한정짓는 꿈을 통해 공감을 얻게 하지만 명사는 완전한 일치의 이상과는 달리 형용사의 도움 없이는 언제나 불일치의 길을 열어놓는다.

법이 명사이기에 명사는 언제나 형용사를 불러들인다. 이러저러한 꿈이 있듯이 법 자체도 꿈이 있는 것이다. 법의 권위가 의미하는 것은 ‘법은 곧 권위’였지, ‘권위를 제약하는 법’이 아니었다. 대중들에게도 회자되는 ‘법치주의’에 대한 담론 속에서 정작 비어있는 건 우리의 의식들이고 우리의 의식들이 빚어내야만 하는 형용사들이다. 하지만 현실에는 법이라는 명사에 대한 냉소적이고 우울한 진단이 떠돌고 있을 뿐이다. 법은 냉소적 이성의 산물이 아니다. 법은 형용사적 의식의 산물이다. 민주주의적 헌법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법이 민주주의적으로 제정되어야 한다는 당위로부터 법의 꿈이 무엇일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는다. 법의 꿈 꿀 권리마저 박탈당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것은 법을 구체화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즉 형용사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들이 추상적이고 독단적인 명사를 통해 지워져버리고, 그 자리에 획일화된 법의 제국을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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