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책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두 철학자는 작년 하반기 『대학신문』의 연재 ‘21세기의 사유들’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 랑시에르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고 아감벤은 ‘정치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2000년대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두 사람은 21세기에 접어들어 세계적인 철학자로 주목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덧붙여 한국어로는 올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나란히 묶일 수 있다.

이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감성의 분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등이 우리말로 번역된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을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이 더 소개될 예정이고(그는 이번 주에 서울대를 비롯한 국내 대학에서 방한 강연을 갖는다), 주저인 『호모 사케르』(1995)로 처음 이름을 알린 아감벤은 최근 출간된 『남겨진 시간』에 이어서 ‘호모 사케르’ 연작과 『목적 없는 수단』, 『언어와 죽음』 등의 한국어본을 더 얻을 예정이다. 멍석이 깔린 만큼 이제 필요한 것은 두 사람의 사유를 제대로 읽고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겠다. 두 철학자의 신간을 중심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을 몇 가지 짚어본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정치에 대한 새로운 테제

알튀세르 사단의 일원으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알튀세르의 교훈』(1974)을 기점으로 스승과 작별한 랑시에르는 1970년대에 19세기 노동자의 문서고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사유의 영토를 개척한다. 그는 사회적 분배가 어떻게 이뤄지고 ‘몫이 없는 자들의 몫’은 어떻게 배제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도출해낸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0/1998)는 그의 사유를 집약해 정리해준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은 통치와 평등이라는 두 이질적인 과정의 충돌이다. 통치의 과정이란 사람들을 공동체로 조직하고 그 자리와 기능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서 ‘치안(police)’을 가리킨다. 평등의 과정이란 ‘몫이 없는 자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그 실천을 말하며 ‘해방’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해방을 위한 소송을 랑시에르는 ‘정치(politics)’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이란 정치와 치안이 만나는 현장이다.

치안과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정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르케(arche, 근본)’를 갖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아르케’의 논리, 즉 정치는 어떤 일을 시작하고 지배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자, 곧 앞장서는 자를 요구한다는 논리와 단절한다. 때문에 아나키적이며, 실상은 ‘데모스의 통치(democracy)’로서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지칭하는 바이기도 하다.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에서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제비뽑기, 즉 통치할 자격의 부재다”. 즉, “민주주의는 시작 없는 시작이며 지배할 자격이 없는 자의 지배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비하는 플라톤이 그랬듯이 ‘데모스의 통치’를 ‘자격을 갖지 않은 자들의 통치’로 규정하는 데서 비롯한다. 이때 기원적 의미로서의 ‘데모스(demos)’는 공동체의 이름이기 이전에 공동체의 한 부분인 빈민들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 ‘빈민들’이 경제적으로 낙후된 주민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르케의 힘을 행사할 자격이 없는 자들’, ‘셈해질 자격이 없는 자들’, 즉 ‘몫이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그렇게 ‘내쫓긴 자들’의 이름이며 정치란 그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몫에 대한 요구이고 주장이다. 정치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며, 몫을 갖지 않은 자들을 다시 셈하는 것이다(그리하여 감각적인 것을 다시 나누고 분배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이며 불화다. 치안과 정치가 충돌하는 경계로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는 바로 그러한 불일치와 불화가 그려내는 자국이고 흔적이다.

『남겨진 시간』, 바울의 편지에 대한 새로운 주석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와 비교될 만한 아감벤의 책은 곧 소개될 『목적 없는 수단』이다. ‘정치에 관한 노트’가 그 부제이기 때문이다. 『남겨진 시간』과 조응할 만한 랑시에르의 책은 지적 해방에 관한 다섯 차례의 강의를 묶은 『무지한 스승』일 듯싶다. 『남겨진 시간』 또한 사도 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여섯 차례의 강의록이기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에서 주권의 역설적 논리를 분석하고 수용소야말로 근대성의 노모스(nomos, 규범)이면서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던 아감벤은 『남겨진 시간』에서 바울의 편지에 대한 치밀하고도 유려한 문헌학적 주석을 통해 그의 메시아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면밀히 조명한다. 그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것은 고대 그리스어 성경의 로마서 1장 1절을 구성하는 10개의 단어다. 아감벤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란 뜻으로 풀이되는 이 구절의 원문 “PAULOS DOULOS CHRISTOU IESOU KLETOS APOSTOLOS APHORISMENOS EIS EUAGGELION THEOU”를 구성하는 각 단어에 주석을 붙인다. 로마서야말로 바울의 사상과 복음에 대한 증언적 요약이며, “글의 첫머리 한개 한개의 언어가 편지의 텍스트 전체를 총괄하는 형식으로 스스로 축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말에 대한 이해는 텍스트 전체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아감벤은 ‘CHRISTOU’가 뜻하는 ‘그리스도’가 단지 ‘기름 부어진 자’를 뜻하는 헤브라이어 ‘마시아(=메시아)’를 그대로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란 ‘구세주 예수’ 또는 ‘예수라는 구세주’를 가리킬 뿐이라는 점에 주의하도록 한다. 그리고 ‘소명 받음’을 뜻하는 ‘KLETOS’의 파생어 ‘클레시스(klesis)’는 루터에 의해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되면서 ‘직업’이라는 근대적 의미까지 획득하게 됐다고 언급한다. ‘클레시스’는 바울이 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고린도전서)’의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 하십시오”라는 문장에서 나온다.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마치 -가 없는 것처럼’, ‘마치 -이 아닌 것처럼’ 살 것을 형제들에게 요구한다. 일체의 소명에 대한 기각이 아감벤이 읽어내는 바울의 메시아적 소명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어 ‘클레시스’가 라틴어 ‘클라시스(classis)’로 잘못 유추됐고, 다시 마르크스는 ‘신분’을 가리키는 ‘슈탄트(Stand)’와 대립되는 단어로 ‘클라스(Klasse)’를 처음 도입했다는 점. 그것이 ‘계급 없는 사회’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이 메시아적 시간 개념의 세속화라는 벤야민의 지적을 가능하게 한다.

새로운 사유는 또다른 새로운 사유에 대한, 새로운 동참에 대한 요청이다. 비록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영어에서의 번역이라는 장벽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너무 자주 등장하는 복수접미사와 잘못된 음역이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랑시에르의 ‘테제’와 아감벤의 ‘강의’는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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