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리버(Red River)」를 틈새로 보다


1. 무슨 말을 왜 할 것인가

현 시점(2008년)에 이 곳(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어느 반도)에서 1948년 미국에서 나온 서부영화를 다루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사실 우리가 하워드 혹스의 「레드 리버」를 통해서 제기할 수 있는 질문과 답들은 아주 다양한 차원에 걸쳐 분포해 있다. 그것은 물론 이 영화 자체가 역사적(영화사적), 미학적, 정치적 차원에서 모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레드 리버」는 할리우드 고전기의 서부극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고전기 할리우드의 시스템이 어떤 것이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에 대해 먼저 간략히 소개하자면 일단 고전 할리우드 영화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극영화의 뿌리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되는 영화의 절반 이상이 미국영화이고 미국에서 영화제작의 전통이 끊긴 적은 없으니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들과 「레드 리버」 사이에 어떤 유사점들과 역사적 흐름이 보일 것은 당연하다. 할리우드 고전 영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비단 미국영화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미국은 상업영화가 처음으로 발달한 나라이며 거의 항상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드는 나라였고 그런 만큼 영향력도 강했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영화제작자들의 교재이다. 요약하자면 「레드 리버」의 이해가 영화 일반의 이해에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되리란 이야기다 .
이 정도가 할리우드 고전 영화로서의 의미라면 서부극이란 장르영화로서 흥미로운 지점들도 만만치 않다. 존 웨인이라는 배우를 포함한 장르의 관습이 어떻게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끼치는지 살피는 일은 흥미로운 일일뿐더러 분명 영화의 주류인 상업영화 일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장르와 장르영화의 관계에서는 미학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인 작가와 창작, 창조성은 각각 어떻게 정의되며 그들 간의 관계는 어떤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몇 가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서부극이란 장르 자체가 영화사적으로 가지는 의미도 결코 작지 않다.
또한 영화에 가끔씩 등장하는 동성애를 암시하는 장치들과 플롯, 복잡한 인물관계에 대해 탐구함으로써 한 편의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때 필요한 요소인 서브텍스트를 읽는 방법과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금 나오는 영화들보다 훨씬 순진하다고 생각되는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에서 (의식적인 것은 아닐지라도)어떤 정치적 태도들을 발견하는 일은 정치적 올바름과 급진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정리할 때에 「레드 리버」를 지금 여기서 다시 봐야 할 이유는 제시됐다. 결국 이 글은 「레드 리버」를 분석하기보다는 「레드 리버」를 통하여 여러 외적인 질문들을 제기하고 가능한 경우에는 그에 답하는 모양이 되겠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분석과 그로부터 질문을 끌어내는 일은 별개가 아니다. 봐주는 관객과 그 관객을 둘러싼 사회와 사상이 없이 영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보다는 ‘영화보기’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2. 줄거리 요약과 서사 형태 분석

한 마리 소를 가지고 독립한 카우보이 던슨(존 웨인)은 역시 소를 끌고 온 고아 소년을 만나 그를 데리고 목장을 키우기 시작한다. 다른 어떤 설명도 없이 짧은 몽타주와 내레이션 장면만으로 15년의 세월이 지나고 이제 던슨은 장성한 후계자를 둔 대 목장주가 돼 있다. 그리고 수천마리 소를 제 값에 팔기 위해 수십 명의 카우보이와 후계자 맷, 총잡이 체리 등을 데리고 긴 여정에 나선다.
그 많은 동물을 이끌고 황야를 다니는 건 물론 힘든 일이다. 게다가 소를 대규모로 팔 만한 도시의 위치, 철도 가설여부 등에 대한 정보가 불확실하여 이런저런 추측이 겹치면서 의견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던슨은 분열 상황마다 권위적 혹은 폭력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킨다. 헌데 소들의 폭주가 일어나 수백 마리의 소와 함께 한 명의 카우보이까지 잃자 던슨의 분노는 끝까지 치솟고 그 사고를 일으킨 자에게 태형이라는 극단적 수단으로 처벌을 가하려 한다. 고용인들과 목장주 사이의 갈등은 깊어지고 끝내는 몇몇 고용인들이 무리를 떠나려다 던슨과 체리 등의 총에 죽고 마는 극한 상황까지 간 후, 던슨이 야반도주 했던 이들을 잡아서 목매달아 죽이려 할 땐 결국 반란이 일어난다.
이제 지도자의 위치는 던슨의 후계자인 맷이 차지한다. 그는 우선 젊은 나이로 다른 카우보이들을 존중하고 그 의견을 듣는 민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 기존에 세운 계획을 그대로 행하는 건 모두의 체력과 정신력에 무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철로가 깔렸다는 소문을 들은 애벌린으로 목적지를 변경한다.
영화가 시작한 지점부터 천천히 표정이 어두워지던 던슨은 이제 아예 자신의 후계자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등 뒤에서 그들을 쫓아오는 무서운 얼굴을 떠올리며 맷과 카우보이들은 걸음을 재촉한다. 이들은 그 길에 인디언들에게 습격 받는 한 유랑단(대사에 의하면, “도박사들과 여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구해낸다. 여기서 맷과 밀레이의 만남이 이뤄지고 둘은 일단 훗날을 기약하고 잠시 헤어진다.
뒤쫓던 던슨도 밀레이를 만나고 맷을 죽일 마음을 이야기하고 여자는 이를 말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맷의 소거래는 성공했다. 애벌린에서 영웅대접을 받으며 신 나 있던 그들은 마침내 총을 든 던슨과 마주친다.
그러나 죽고 죽이는 결투는 끝내 벌어지지 않고 맷과 던슨이 주먹다짐을 하더니 결국 수레 짐더미 아래서 밀레이의 도움을 받아 화해한다. 던슨은 목장의 낙인에 M자를 더함으로 맷의 위치를 확인해준다.
주된 갈등의 축은 물론 던슨과 맷이다. 이 두 인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된다. 가장 짧게 단순화하면 각각 구세대와 신세대를 대표한다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미국의 역사를 이상적으로 기술하자면 (미국 뿐 아니라 많은 근대국가에도 적용되지만) 정치면에서는 민주주의, 사회면에선 평등사상의 발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산업적으로는 완력이 필요한 일들에서 관리, 지도력이 필요한 일들로의 진화로, 지도력의 속성 면에서는 권위적, 독단적 지도력에서 민주적, 합리적 지도력으로 수요가 변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모든 발전과정에서 맷은 던슨의 다음 세대, 후계자에 해당한다.
이런 논의에서 출발해 이 글을 사회학적, 역사학적 연구로 발전시킬 생각은 없다. 그보단 이와 같은 영웅-후계자 구도가 얼마나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플롯인지를 지적하고 싶다. 자기 분야에서 성실하고 유능하게 일하여 일가를 이루었지만 그리 오랜 세월 쌓은 업적과 그간 키운 습관 때문에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여 마찰을 일으키는 스승. 그런 스승을 믿고 따르지만 그 보수성에 답답함을 느껴 점점 가르침을 이탈하는 후계자. 둘의 갈등이 커지며 이야기가 전개되다 결국 둘 다 옳은 동시에 그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화해하고 이상적인 새 길을 찾는다. 「레드 리버」 뿐 아니라 현대의 서사물에선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방식은 낡았어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하지 않나? 뛰어난/인정받은 리더-총잡이와 어린 후계자 구도는 서부극의 한 서브장르라 할 만큼 일반화돼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는 장르와 작가와 스타의 관계에 대한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겠다.
다만 여기서 작게 짚고 넘어갈 것은, 「레드 리버」가 이런 전범화된 플롯을 따르면서 그것을 비틀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서로를 죽일 뻔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고 갈 뿐이다. 단순한 헤게모니적 갈등 외에 훨씬 더 심리적이고 미묘한 갈등도 포착되기는 하나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줄거리 상으로는 아주 단순한 갈등구조이다. 하지만 장르로서의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발전이란 결국 특정 플롯, 갈등구조, 인물상들의 전범화 과정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릴 때 「레드 리버」가 이런 전형적인 플롯으로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서브장르로서의 특성에 앞서는, 일반적인 서부극으로 「레드 리버」를 규정하는 요소도 여럿 있을 것이다. 일단 카우보이와 총, 황야와 같은 소재나 폭력이 갈등의 주된 해결수단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주인공 던슨을 연기한 존 웨인이라는 배우는 그 자체로 서부극의 아이콘인 동시에 어깨에선 먼지 냄새를 풍기고 손에선 화약 냄새를 풍기고 눈빛으로는 지평선과 따뜻한 집에 대한 동시적 갈구를 보여주는 서부영웅의 전문배우이기도 하다. 존 웨인이라는 배우와 함께 「레드 리버」에서 가장 서부극적인, 그 장르의 팬을 끌어당기는 또 다른 요소는 시원한 로케이션 촬영이다. 러닝타임의 대부분이 야외 장면에 할애되며 이때 담기는 풍경은 수많은 소들이 벌판에 있거나 카우보이들이 말을 달리는 장면이다. 물론 이 중에서도 압도적인 활력과 거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단연 폭주 장면이다. 이러한 일반 서부극 장르로서의 특징도 물론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또 머리말에서 짧게 언급했듯 우린 「레드 리버」의 주된 인물관계들에서 상당히 뚜렷한 동성애 성향의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맷과 체리가 처음 만나 서로 총을 주고받으며 노는 장면, 맷과 던슨의 유난히 절친한 관계 등에서 여러 재미있는 점들을 발견할 수 있어 특수한 영화적 긴장감이 생긴다. 이 중에서 맷과 던슨의 관계는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가 어떤 남자와도 함께 하지 못하고 울면서 도망치게 만들 정도로 친밀한 관계이다. 구체적으로 영화 속에서 어떤 장면이 나타나는가, 그에 대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는 4장에서 할 것이다.

3. 장르와 스타와 작가와

서부극 장르의 관습이란 실로 수많은, 그것을 정의하는 연구자의 성향과 포함되는 영화의 범위에 따라 무한히 많아질 수도 있는 요소들의 총체이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 관습의 가장 구별되기 쉽고 뚜렷한 요소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자. 특정 장르를 전문으로 하는 스타에 대해서 말이다.
고전기 할리우드의 위대한 혹은 유명한 배우들은 대개 지금과는 달리 가능한 한 다양한 역을 소화해내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관객이나 제작자들도 굳이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스타들은 매번 비슷한 분위기, 줄거리의 영화 속에서 비슷한 성격의 인물을 연기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여러 편의 영화 속에 반복되며 배우가 맡은 역은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그 배우 자신과도 같게 되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생각보다 많은 일이 가능했다.
당시의 재능 있고 부지런한 감독, 배우들은 이 스타들이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히게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다양한 시간대에 나온 영화들에서 똑같은 인물을 연기함으로 마치 여러 주인공들로 하여금 한 인물이 성장과정에서 각각 다른 시간대에 스스로를 나타낸 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렇게 배우뿐 아니라 장르의 주인공 자신이 성장함과 함께 장르의 진화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레드 리버」를 만든 하워드 혹스처럼 어떤 재치 있는 작가들은 이런 스타의 기존 이미지를 해체하거나 패러디하기도 했다.
물론 그가 「레드 리버」에서 행한 작업을 패러디라고 볼 순 없지만 해체로는 볼 여지가 있다. 1948년이라면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한동안 그 제작이 많이 침체됐었던 서부극 장르가 제2의 화려한 전성기를 맞은 지 불과 10여년이 지난 후이지만 그 때 이미 해체와 패러디, 전복의 대상이 될 만한 많은 장르적 관습, 전범들이 존재했고 존 웨인이라는 스타 역시 그 중 하나였다.
1939년 작으로, 그를 처음으로 스타덤에 올린 「역마차(Stagecoach)」의 존 웨인만 해도 상당히 미남으로 보아줄 여지가 있다. 하지만 당시의 그는 이미 서른이 넘어 있었고 그 후로 그가 겪은 과정은 배우로서는 성장이었겠지만 생물학적 인간으로서는 분명히 노화였다.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는 이 배우, 그의 대표작인 「수색자(The Searchers)」(1956)같은 영화에서 보면 영락없는 배불뚝이 아저씨이다. 이런 외모를 가진 그가 수많은 서부극에서 계속 주인공을 연기하며 쌓아올린 이미지를 대충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듬직한 덩치를 가지고, 백인들의 마을이 굴러가는 방식과 황야의 자연 법칙들, 인디언들의 행태나 규칙들을 꿰고 있으며 총 솜씨로는 따를 자가 없고 자기 할 일을 똑바로 하고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은 거칠고 지배적인 성향을 띠기도 한다.
「레드 리버」에서 던슨이 갖는 성격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던슨의 성격을 설명하면 아까 「레드 리버」나 다른 서부극 뿐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들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단순화한 후계자 플롯에 대한 설명도 보충될 것이다. 던슨이 하려고 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한테 미친 짓으로 생각되는 일이다. 소들의 이동이 끝나고 거래를 하는 멜빌이나, 레드 리버 목장 근처의 다른 목장주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이동해야 할 거리가 너무 길고 몰고 가야 할 소는 너무 많다. 게다가 비슷한 일을 시도하다가 인디언의 습격으로 실패한 예가 근래에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이동과 거래를 해내지 못하면 십오년간 키워온 소를 모두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다. 아니, 헐값에나마 처분할 시장도 마땅치 않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과감한 결단력에 더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강한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결단력, 추진력 등에 약간의 폭력성이 더해질 수도 있다.
아까 영웅-후계자 플롯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승, 혹은 옛 영웅이 가진 자질과 성격들이 단순히 시간이 지날수록 실정에 점점 맞지 않게 된다는 식으로만 설명했지만 「레드 리버」 안에 묘사된 상황과 같은 경우엔 우선은 그런 과감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과감함을 가지고 수십 명의 카우보이를 통제하며 자연의 위협과 인디언들의 습격에 맞서며 무리를 이끌어갈 지도자로서 아까 설명한 이미지대로의 존 웨인보다 더 적절한 인물이 있겠는가?
한데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존 웨인의 아우라를 두른 토마스 던슨에 대한 해체 작업이 시작된다. 제일 먼저 그의 과도한 폭력성에 대한 암시를 주는 부분은 던슨과 그루트가 행렬에서 떨어져 나와 둘이서 야영을 하는 첫날밤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먼저 그들이 떨어져나온 행렬을 습격했던 인디언들은 그날 밤 던슨과 그루트의 야영지를 습격한다. 여기서 두 사람은 노련한 카우보이들답게 공격하는 인디언을 모두 쏘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던슨은 한 번 위기에 처한다. 총을 쏘지 못하고 인디언 한 명과 함께 개울에 빠져 육탄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그루트가 칼을 던져주고 던슨은 그 칼로 상대를 찔러 죽인다. 서부극에서 주인공이 총이 아닌 칼로 상대를 죽이는 일 자체가 흔하지 않을뿐더러 이 장면에선 칼이 휘둘러질 때마다 배경음악이 ‘빰’, ‘빰’하고 무섭게 울린다.
기본적으로 내재돼 있던 폭력성에 대한 암시와 함께 앞으로 그가 겪을 내적 갈등과 혼란의 시발점으로 제시되는 것은 한 가지 잘못된 선택이다. 그루트와 함께 일행을 떠나 자신의 목장을 차리려 할 때, 던슨은 함께 하려는 여인, 펜에게 이는 여자한테는 너무 힘든 일이니 나중에 자신을 찾아오도록 부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그 행렬은 인디언에게 습격을 받고 결국 펜은 죽은 걸로 밝혀진다.
이런 두 가지 심리적 동기를 업고 시작된 던슨의 소몰이는 한동안은 별 문제 없이 진행된다. 이미 이야기했듯 던슨의 조금은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성격이 이 여행에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갈등의 씨앗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고 그것이 표면화되기 시작하는 지점은 소들의 폭주이다. 여기서 던슨은 문제를 일으킨 카우보이 커넬리를 미간을 쏴 죽이려 하지만 맷의 방해로 실패한다. 그러다 결국 밤에 고용인들이 도망가는 문제가 발생하고 던슨은 더 이상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이유로 무리한 일정을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않음으로써 고용인들을 몰아붙이는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고생시킨다.
관객도 이런 고생과 내적 갈등을 함께 한다. 던슨이 커넬리와 대립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소들의 폭주 속에 죽은 댄을 묻어주고 던슨이 성경을 읽고 있다. 다른 카우보이들도 모두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인 채 동료를 기린다. 이때 카메라는 던슨과 동료들이 모인 무덤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들의 등을 관찰하고 있다. 그리고 컷 없이, 일행은 뒤를 돌아서 짐과 말, 마차 등이 있는 카메라 쪽으로 다가온다. 이때까지는 음악도 고인을 기리는 분위기인데, 카메라가 던슨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왼쪽으로 움직이자 마차에 걸린 채찍이 보이고 순간 음악과 던슨의 표정이 함께 어두워진다. 그리고 바로 그 채찍을 잡고는 커넬리에게 가서 그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 컷이 한 번도 없다.
장례식에서 죽음에 대한 문책으로의 이러한 연결은 일단 논리적으로 자연스럽다. 또한 원거리에 있는 인물이 카메라에 가까워지고 다가오고 그 움직임을 부드럽게 따르는 롱 테이크 촬영 덕에 현장감은 살아나고 던슨의 감정은 생생하게 묘사된다. 이어지는 장면에선 폭우 속에 소를 몰고 있다. 이동 장면의 촬영에 대해선 나중에 더 자세히 말하기로 하고 계속해서 비가 몰아치는 밤으로 가보자. 비는 그야말로 심하게 내리고 카우보이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천막 아래에서 지긋지긋한 쇠고기 요리를 받아먹는다. 관객에게도 질척한 땅과 눅눅한 공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여기서도 던슨은 맛없는 커피에 대해 불평하는 틸러에게 자신의 뜻이 확고함과 그들이 고생을 할 수밖에 없음을, 짜증스러운 태도로 이야기한다. 이런 식의 던슨과 카우보이들 간의 갈등의 표면화는 곧 던슨이 제 정신을 잃어가는 과정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곧 스타 존 웨인이 고유하게 가지는 캐릭터가 무너져가는 과정, 다시 말해 장르의 전범 중 하나가 해체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던슨이란 인물이 겪는 일과 그의 성격 변화는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레드 리버」라는 한 영화의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갈등과정임과 동시에 현대 서사물에서 보편적인 스승-후계자 플롯의 진행이기도 하며 서부극 장르의 한 전범의 해체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이 장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자. 특정한 아우라를 가지는 스타의 존재가 영화의 제작자들에게 오히려 더 큰 선택의 여지와 자유를 주었다고 선언했었다. 원한다면 그들은 스타를 이용하여 특정 영화의 인물의 성격을 구축하는 데 드는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었고, 혹은 스타의 등장만으로 관객에게 이미 인지되는 그 인물의 성격, 배경 등을 이용하여 훨씬 풍부한 인물상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레드 리버」의 감독 하워드 혹스가 택한 길은 그 해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영화 초반의 던슨과 후반의 맷의 관점에서는 갖은 역경을 맞은 카우보이들의 승리를 찬양하는 고전적인 서부극인 동시에, 끝까지 던슨의 관점을 고수할 때는 장르의 오래된 관습을 반성하고 고쳐보기도 하는 자의식적 영화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성질은 일견 충돌, 혹은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데 실은 이런 쉽지 않은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야말로 배우 존 웨인의 아우라와 같은 견고한 장르적 관습인 것이다.
최근에 나온 영화 「다크 나이트」도 이런 모순돼 보이는 두 가지 작업을 병행했다. 한 명의 악인이라기보다는 절대적 혼돈과 비슷해 보이는 조커란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할리우드 수퍼 히어로 영화들에서 과연 그 영웅들이 힘겹게 싸우는 상대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음과 동시에 사태를 오해한 경찰들을 다치지 않게 제압하고 악당들을 모두 해치우고는 어둠 속으로 도망치는 배트맨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고전적인 다크 히어로 배트맨의 위치는 공고히 한다. 「레드 리버」에서 장르로서의 서부극이 하는 역할을 「다크 나이트」에서는 수십 년 역사를 가진 배트맨 코믹스와 그 팬들이 해낸다(주요 등장인물의 몇 가지 기본적인 설정들, 결국 배트맨은 어떤 식으로든 승리하리라는 믿음과 같은 것들을 통하여). 어느 쪽이든 간에 흔히 창작의 자유를 해치는 것으로 생각되는 역사적 관습들이 오히려 작품에 더 풍부한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거의 모든 예술에서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이고 영화의 경우엔 특히 더 그렇지만, 작품을 만드는 것은 한 명의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논의는 당장 「다크 나이트」의 예에서 보았듯이 어떤 구체적인 영화들을(특히 그것이 장르 영화일 때는) 볼 때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상이 장르라는 거대한 체계가 개별 작품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에 대한 논의였다면 아래에서는 영화의 작가-감독이 작품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을 살펴보겠다. 초점을 맞추고 싶은 부분은 로케이션 촬영인데 이는 그것이 「레드 리버」의 감독, 하워드 혹스의 이력에서 비교적 이채로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워드 혹스는 주로 실내에서 촬영을 했다. 그 안에서 인물들 간의 밀도 있는 긴장을 조성하거나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했지 바깥으로 나가 광활한 자연을 보여주는 것은 그리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 영화처럼 예외인 경우들도 없지 않은데 재미있는 점은 그럴 때에도 인물과 인물이 하는 일에 집중하는 태도가 그대로 지켜진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레드 리버」의 산과 황야, 큰 강은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는 할리우드 고전기의 또 다른 거장이자 평생 서부극을 만든 존 포드 같은 감독과 대비되는 점이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거의 항상 배경으로 나온 모뉴먼트 밸리의 기이한 언덕, 봉우리들은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들로 보이며 현세적인 그 안의 사물들-사람과 그들이 모는 마차. 말 등을 모두 압도한다. 이 거대한 시각물은 영상 속의 인물들 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 압도적인 원시성에 대한 매혹은 분명 서부극이란 장르의 팬들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이다. 한데 혹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레드 리버」에서 아무리 그럴듯하게 생긴 산과 강이 펼쳐져 있어도 카메라는 인물이나 소떼와 정도 이상으로 거리를 벌리지 않는다. 이런 내러티브의 영화에서 익스트림 롱 샷이 나올 만한 장면은 역시 이동장면일 것이다. 일상적인 대화 장면이나 인물이 주가 되는 장면에선 웬만해선 카메라가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우니까. 그런데 이들이 움직이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별로 멀리 가지 않는다. 비교적 멀리 떨어지는 장면들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활기차게 말을 달리는 모습(심즈와 버스터가 담수호를 발견하는 장면)이나 소들의 평화롭고도 무게감 있는 이동, 혹은 앞에서도 언급된 폭우 속에서 소를 몰며 피로에 찌든 고개를 뒤로 돌리는 카우보이의 모습 등이다. 그들이 언제나 전경이다.
하지만 꼭 거대한 자연물이 아니어도 그것이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것 못지않은 경이와 압도당하는 느낌을 주는 무엇이 「레드 리버」에 있는데, 이는 물론 두말할 것 없이, 폭주(stampede) 장면이다. 이 폭주는 던슨의 폭력성이 최초로 외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를 제공하고, 그들 여정의 첫 번째 본격적인 난관이라는 중요한 서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미국의 광활한 사막과 평야를 배경으로 하는 서부극 고유의 미덕중 하나인 시각적인 압도를, 감독의 성향대로 자연물이 아닌 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진짜로 내 심장을 가쁘게 했던 장면은 따로 있다. 길고 힘든 여정을 함께 하겠다고 서명한 카우보이들이 각자의 말에 올라 자리를 잡고 서있다. 카메라가 빠르게 컷하며 여러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음악은 긴장감 있게 흐르고, 던슨의 뒷모습이 등장해 카메라에서 멀어진다. 그렇게 달려와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한 던슨. 매튜에게 출발 준비가 됐는지를 묻고, 던슨의 시점에서 카메라가 돌면서 주변 인물들을 모두 검사하는 듯 하더니, 천천히 패닝하던 카메라에 마지막으로 잡히는 것은 던슨 자신의 모습이다. 매튜도 이어받은 그의 습관대로 오른손가락으로 코를 멋쩍게 문지르더니, 마침내 맷에게 말한다. “이들을 미주리로 데려가자.” 맷의 첫 번째 신호를 시작으로, 카우보이들은 “이~하!”하고 소를 모는 외침을 시작한다. 카우보이 한 사람의 한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긴다. 빠르게 컷되는 그들의 모습은 말과 사람을 한꺼번에 담은 풀 샷에서 출발하여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신나게 소리 지르는 얼굴들의 클로즈업 샷이 연속된다. 이것은 서부 사나이의 먼지 냄새만 맡아도 한숨과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서부극 장르의 팬들과 독특한 편집기법을 즐거워 할 영화광과 아무래도 미친 짓이라고 생각되는 일에 용감하고 자신 있게 도전하는 사나이들의 모습에 감동할 사람들까지 모두 움직일 수 있는 실로 힘 있는 장면이 아닌가.
그런데 바로 여기서, 아주 어려워 보이는 직업적인 과제에 대한 무심하고도 끈질긴 도전이라는 주제는 먼저 설명한 인물, 개인의 중심성과 함께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이렇듯 「레드 리버」의 가장 매력적인 장면들은 모두 장르적 특징과 작가적 특징이 뒤섞여 충돌하거나 하나 되는 지점들이다.

4. 순진한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급진성

영화에 대한 정치적 논의는 이미 뿌리가 깊고 가지도 넓게 드리워져 있다. 허나 어느 정도 깊이 있는 논의가 아닌 요새 흔한 저널리즘 비평이나 블로그 영화평 등의 차원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1차원적인 기준으로 나누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판단 기준에서 대부분의 고전영화, 특히 미국 영화는 아주 쉽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당대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친화적인, 순진한 영화들로 치부되고는 한다. 이어질 논의에서는 ‘순진한’ 할리우드 영화인 「레드 리버」에 드러나는 균열적인 암시들을 분석함으로써 영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혹은 급진적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레드 리버」에는 비록 그것이 만든 이들의 의도였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나 현대의 관점에서는 동성애적인 암시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 몇 개 등장한다.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것은 맷과 체리가 처음 만나 서로 총을 주고받으며 노는 장면이다. 총이 항상 남근의 상징으로 읽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서로의 총과 얼굴을 쳐다보는 두 배우의 연기 톤과 계속 둘을 친밀하게 투 샷으로 잡는 촬영 등 이 장면의 모든 기운이 그 총을 다른 식으로 바라볼 수 없게 한다. 그러면서 하는 대사란 것이 “네 꺼 한 번 줘봐.” “정말 좋은데?” “정말 멋지고 좋아.” 이런 식이다. 여기서도 맷은 자기 총을 상대에게 건네주기 전 멋쩍게 오른손가락으로 코를 만진다.
맷과 던슨의 부자관계, 영웅-후계자 관계도 심상치 않다. 일단 이들에겐 성애적인 상대가 없다. 던슨이 사랑한 펜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죽어버렸고 맷의 상대인 밀레이는 한참 후반에나 나오는데다 그 후에도 맷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주 짧다. 던슨이 목장을 키운 게 15년이니 그 새 안정된 생활을 위해 결혼했을 법도 한데 여태 혼자다. 그리고 그가 펜에게 주었던 선물인 뱀 모양의 팔찌는 어느새 맷의 손목에 가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둘의 관계를 강변해주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맷의 연인 밀레이다. 던슨과 맷이 주먹다짐을 하다가 물건이 쏟아진 수레 아래서 화해를 하는 마지막 장면. 여기서 두 사람의 싸움을 중단시키는 것은 밀레이다. 그런데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서부에서 가장 거친 사나이(존 웨인은 그런 분명 그런 사나이다)를 한 번에 제압해버린 그 강단 있는 여자가 그 다음에는 울기 시작한다. 그렇게 서로를 죽이겠다고 우기다니! 그런 바보같은 일이!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면서! 엉엉엉! 차라리 계속 싸워요! 하고는 뒤돌아 도망가 버린다. 던슨과 맷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데 밀레이가 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뻔한 해답이 일단 한 개 보인다.
한데 이렇게 발견되는 암시들이 작가의 의도에 의한 것도 아니고, 내러티브상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라면 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바로 여기서 어떤 영화가 급진적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자. 이 말은 그 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질문하게 한다는 뜻이다. 명백한 사실, 자명한 사실, 절대적 가치라고 생각하던 무엇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가치체계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에서만 유효하다는 사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어떤 실재와 가치관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 정말 효과적인 방법은 아주 견고하고 (기존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세계를 보여주면서 거기에 틈을 내는 것이 아닐까? 기존의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다른 것들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를 보여주면서 그 뒤에 숨어있는, 숨어야 했던 것들의 존재를 내비치는 것이 관객이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에는 훨씬 효과적이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레드 리버」가 던져주는 혹은 유발하는 질문들은 어떤 것일까? 사실 이쯤에서 독자의 질문이 먼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맷과 체리의 관계, 혹은 맷과 던슨의 관계를 정말 그렇게 동성애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고 물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 질문에 예나 아니오로 뚜렷하게 답할 생각은 없다. 평론이 해야 할 일은 그 존재가 확실한, 영화의 표면 이하의 그 무엇을 지적해 내는 것이다. 그것의 의미는 관객-독자가 알아서 생각할 일이다. 그러나 나 역시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그 의미를 짚어보자면 영화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동성애적인 공기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표면적인 플롯에서는 그들이 정말로 성애적인 관계를 맺거나 하지는 않는다. 기껏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어떤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혹은 밀레이와 같은 주변 사람이 그런 분위기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맷과 체리는 긴 여정을 함께 하고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는 동료로서, 그리고 던슨과 맷은 사실상의 부자로서 이미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장면들도 이런 관계로 충분히 설명될지 모른다. 실제로 이 영화가 상영될 당시의 관객 대다수도 적어도 언어화된 의식 수준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읽어내는 일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이미 설명했다. 그리고 「레드 리버」가 던지는 질문이란 것도 사실은 이미 다 나왔다. 바로 그 관계의 애매성 말이다.
어쩌면 오늘날 성과 사랑에 대한 기존 이데올로기에 대한 급진적 비판의 필요성 때문에 보급된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구분하는 개념과, 전통적으로 있어왔던 성애적인 사랑과 다른 종류의 사랑을 구분하는 개념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제한하는 것은 아닐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양성애적인 성향을 공유하고 있을 지도 모르고, 사랑과 우정은 그다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레드 리버」의 복잡한 인간관계가 그런 사실 혹은 가능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5. 줄이고 맺는 말

이 글을 쓴 데에는 크게는 할리우드 영화, 작게는 할리우드 고전 장르영화에 대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선입견들을 공격하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 첫 번째 선입견은 미국 영화산업의 철저하게 상업적인 시스템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번 똑같은 영화를 만들게 하고 덕분에 그들은 충분히 창조성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서부극 장르와 영화 「레드 리버」를 문제로 삼아 존 웨인이라는 스타와 광대한 로케이션 촬영과 같은 전형적인 장르의 관습들이 작가 하워드 혹스의 창조성을 제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의 상호작용으로 더욱 풍부한 의미를 만들고 관객들을 자극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두 번째 선입견은 역시 철저하게 상업적인 할리우드 영화들은 기존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혹은 그에 대해 질문하는 내용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요즘엔 관객들 자신이 어느 정도 깨어서 조금 급진적인 영화도 만들 수 있지만 옛날엔 도저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대한 반론은 기존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보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영화일수록 오히려 그 균열을 잘 드러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위의 두 가지 논점은 서문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논점으로 제시된 것이다. 첫 번째로는 옛날 할리우드 영화를 봄으로써 오늘 우리가 보는 영화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작업 역시 문제의 선입견들에 대한 반박과정에서 함께 이루어진 것 같다. 장르-작가 관계 중심의 분석 작업과 영화의 서브텍스트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수많은 ‘빤한’ 상업 영화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영화보기가 중요하다고는 했어도 상대적으로 영화에 대한 분석이 이렇게까지 소홀해진 건 아쉬운 노릇이다. 하지만 정형화된 만큼이나 정교한 할리우드 고전 영화들은 원래 분석하기 쉽지 않은 대상이다. 부드럽게 잘 만든 영화일수록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말을 늘어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존재했던 몇 가지 틈은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오히려 영화를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 부드럽고 정교한 구조와 작은 균열들. 이것이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작가와 관객 사이에, 예술과 산업 사이에 존재하는 영화가 가진 진짜 매력이다.

6. 참고 문헌

1) 토마스 샤츠,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한나래, 1995.
2) Robin Wood, Howard Hawks, new edition, Wayne University Press, 2006.

영화평론, 시나리오 부문 심사평

당대의 영화를 다르게 읽는 패기 기대해

김영진 교수 명지대․영화뮤지컬학부

올해 대학문학상 영화평론 부문 응모작은 하워드 혹스의 고전 할리우드 영화 「레드 리버」에 관한 「‘레드 리버’를 틈새로 보다」와 이창동의 「밀양」에 관한 「지금 햇볕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나요?-라깡의 이론을 중심으로」 두 편이었다. 두 편 모두 대학생이 쓴 글답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성실한 독서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선 대학생의 글다웠으나 교과서적 글이라는 점에선 대학생의 패기가 아쉬웠다.

특히 「지금 햇볕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나요?-라깡의 이론을 중심으로」가 그러했다. 「밀양」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라깡의 기본 개념을 축으로 해부하는 이 글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없었으나 글의 설정 자체가 평이했다. 지난해 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에 응모한 작품들이 모두 「밀양」에 관한 것이었음을 상기하면 한 해가 지나 다시 이 영화를 분석하려는 시도치고는 야심이 모자랐다고 보이는 것이다. 아울러 거기 동원된 분석의 필터도 새로운 것이라 보기엔 아쉬웠다. 라깡의 개념을 원용한 것을 빼면 기왕에 논구된 「밀양」의 텍스트 심줄을 새롭게 해부했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신선하지 않다는 점에선 「‘레드 리버’를 틈새로 보다」도 마찬가지였다. 장르 시스템에 완강히 포박된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전복성에 주목하고 그 측면에 기여한 작가의 창의적 매개성을 해부한 이 글의 입론은 유명한 혹스 전문가인 서구 비평가 로빈 우드의 연구성과에 크게 빚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글을 가작으로 추천하기로 했다. 글의 필자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지금 시점에 고전을 다시 읽는다는 것의 의의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여하튼 새롭게 풍부하게 고전을 재해석하는 작업이 캠퍼스에서 젊은 학도의 눈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번 응모작들이 올해의 영화를 약속이나 한 듯이 외면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당대의 영화를 기성 평론가와는 다르게 읽는 시도, 또는 특정 영화에 대한 기왕의 평가와 별개로 재발견이나 재해석의 여지를 주는 패기만만한 시도가 내년에는 활발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인평론의 미덕은 무엇보다 ‘나는 이렇게 보겠다’는 비평적 의지의 확인이 중요하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끝으로 시나리오 부문 응모작인 「울어라 파랑새」의 경우, 희곡인지 시나리오인지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았다. 시나리오 부문에 응모했지만 형식은 희곡에 가까웠다. 이것도 나름대로 형식적인 실험이라면 모르겠으나 영화 시나리오로 읽기엔 시각적 상상력이 모자랐고 대사 위주였다. 응모작을 낸 모든 분들의 건필을 빈다.


당선소감

저급 영화광의 고민

염호영 응용생물화학부․03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문학평론과 영화평론은 대학문학상에서 공모하는데 음악평론, 조형예술평론 등은 공모하지 않는다. 영화나 음악이나 그림이나 문학이나 모두 문화의 계통수에서 비슷한 높이에 있는, 하나의 갈래일 뿐이다. 분야마다 평론가가 있고 평론활동이 이뤄지고 있건만 왜 대학에서는 문학/영화평론만 공모할까?

그것은 문학과 영화의 경우 작품 자체가 개념적이기 때문이다. 음악이나 회화는 개념 이전에 감각적인 형태로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우리가 해석해야 하지만 문학은 처음부터 개념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기가 쉽다. 감각적 정보인 음악이나 회화를 분석해서 그 생각을 언어화하는 일은 거의 평론가의 전유물이다. 반면에 소설이나 영화에 대한 평, 감상은 인터넷에서 수없이 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여기서 나 같은 저급 영화평자의 갈등이 발생한다. 영화광으로서 영화의 차별성을 세우며 문학처럼 순수하게 개념적이지 않고 시청각적 자극을 가하는 것이 영화의 장점이자 특징이라 말하고 싶지만 난 평론가가 아니라서 정작 영화의 감각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평을 하기 어렵다. 내가 쓸 수 있는 영화평은 영화의 개념적․서사적 측면에 대한 것으로 국한될 가능성이 높지만 쓰고 싶은 영화평은 그 감각적 측면에 대한 것이다.
이 두서없고 못 쓴 글이 그래도 대학문학에 포용될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해묵은 갈등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부끄러운 일은 글을 못 쓴 것보다도 영화에 대한 고민이 충분하지 못했던 점, 각 측면을 통합하여 보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점이다. 이번 수상을 더 열심히 고민하고 생각하라는, 또 같이 생각하자는 격려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는 모든 걸 제쳐놓고 영화만 보던 내 삶을 인정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또 씨네꼼 친구들, 특히 사실상 본문의 아이디어 대부분을 제공한, 여름내 함께 서부극을 공부한 두 친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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