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됐다. 인류와 침팬지의 기원이 같다는 다윈의 주장은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자연선택설은 우생학으로 악용되기도 했고 진화심리학을 비롯한 새로운 학문 분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다윈이 내린 결론은 이전의 어떤 이론도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다. 지구상의 수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생명 현상을 설명하기엔 자연선택의 논리는 너무나도 단순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생물학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자연선택설은 진화 이론의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발생학의 성과와 다윈의 진화론이 통합된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 이보디보evo-devo)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생명 형태의 비밀을 벗겨내고 있다. 『대학신문』에서는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맞아 진화론 발전의 역사를 살펴보는 기획 ‘진화론은 아직도 진화한다’를 준비했다.

핀치의 부리와 다윈 진화론

핀치새는 ‘부리’로 유명하다. 20년간 핀치의 부리를 관찰한 기록을 담은 조너던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가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다. 핀치가 유명세를 타게 된 데는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는 다윈의 공이 컸다. 다윈은 비글호 항해 중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핀치새를 만난다. 핀치 부리의 다양한 모양에서 진화론의 영감을 얻은 그는 훗날 자연선택설을 발표한다. 그 후 핀치는 『핀치의 부리』의 한 구절처럼 ‘진화과정을 상징하는 토템’으로 추앙받게 된다.
자연선택설은 크게 두 가지 관찰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나는 핀치 부리의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핀치가 각자 먹이를 다루기 유리한 모양과 크기의 부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딱딱하고 큰 열매를 먹는 핀치의 부리는 크고 뭉뚝했고 나무 속 벌레를 먹는 핀치는 부리가 가늘고 끝이 휘었다. 다윈은 이로부터 ‘변이의 존재’와 ‘적자 생존’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30여년 동안 증거들을 모은 끝에 자연선택설을 발표한다.
자연선택설 발표 이후 다윈은 종교계 뿐만 아니라 진화론자들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생물종이 변화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진화론자들이 왜 다윈을 공격했을까. 장대익 교수(동덕여대 교양학부)는 “당시엔 자연선택이 새롭고 참신한 형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먹이에 알맞은 부리가 ‘왜’ 진화하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어도 ‘어떻게’ 그런 부리가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자연선택설은 명쾌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지구상에 지금껏 살았던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하나의 개체로부터 말미암았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는 대범한 가설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반진화론자는 “고물상에 태풍이 불어닥쳐 우연히 보잉747기가 조립될 확률과 같다”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형태는 발생을 통해 만들어진다

언뜻 허무맹랑해 보이는 다윈의 주장과 거의 유사한 현상이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관찰된다. 바로 하나의 수정란이 완전한 형태와 기능을 갖춘 성체가 되는 과정인 ‘발생’이다. 이건수 교수(생명과학부)는 “말미잘 같은 2배엽 동물이 우리와 같은 3배엽 동물로 진화했듯 발생 과정에서도 2배엽 구조가 비슷한 방식으로 3배엽 구조로 변형된다”며 “진화와 발생의 유사점은 오래전부터 관찰됐다”고 설명했다. 다윈 진화론은 하나의 원시세포가 서로 다른 진화과정을 거치며 물고기도 되고 닭도 됐다고 주장한다. 이는 거의 똑같이 생긴 수정란들이 다른 발생과정을 겪으면서 어떤 것은 물고기가 되고 어떤 것은 닭이 되는 것과 비슷한다.
다윈은 발생과 진화의 놀라운 유사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듬해 미국 식물학자 아서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생학은 형태의 변화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사실들이 담긴 학문인데, 내 책을 평하는 사람들 중 그 점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동료 생물학자들의 무지를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발생학은 진화생물학의 주인공이 될 때까지 한 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다양하고 복잡한 동물을 빚어내는 발생에 대한 지식이 쌓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동안 형태의 기원에 대한 비밀은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보디보, 진화의 블랙박스를 열다

20세기 중반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성과가 발생학에 파급되면서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결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진화발생생물학(이보디보)이라는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이보디보가 진화 이론에 미친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장대익 교수는 이보디보의 등장이 “여지껏 생물학자들이 생각해오던 진화의 방식에 대해 재검토하게 된 계기가 됐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혁명의 시작은 ‘괴물 초파리’에서부터 시작됐다. 1915년 유전학자 브리지스는 ‘호메오 돌연변이’라고 불리는 괴물 초파리를 최초로 분리해냈다. 브리지스가 얻은 초파리는 뒷날개 자리에 커다란 앞날개가 발달해서 ‘바이소락스(bithorax, 가슴thorax이 두개라는 뜻)’라고 불리는 기형이었다. 이후에도 더듬이 자리에 다리가 자라는 ‘안테나페디아(Antennapedia, 더듬이Antenna 자리에 발pedi이 생겼다는 뜻)’와 같은 호메오 돌연변이들이 잇따라 발견됐다.
그보다더 충격적인 발견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1970년대 후반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루이스를 비롯한 유전학자들은 초파리의 염색체에서 각각의 호메오 돌연변이에 대응하는 8개의 ‘혹스 유전자’를 찾아냈다. 안테나페디아라는 변종이 단 하나의 유전자가 고장난 결과라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당혹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독일 생물학자 폴하르트와 비샤우스가 한낱 미물로 여겨지는 초파리의 혹스 유전자와 흡사한 유전자를 지렁이, 쥐는 물론 인간에게서도 발견한 것이다.
혹스 유전자처럼 모든 동물에서 발견되며 몸 전체나 일부를 형성하고 무늬를 결정하는 유전자는 ‘마스터 유전자’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션 캐럴은 마스터 유전자의 발견을 “모든 형태들이 공통 선조로부터 유래했다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이고 새로운 증거”라고 평가했고 루이스, 폴하르트, 비샤우스 세 과학자는 그 공로로 199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했다.

충격적인 발견은 혹스 유전자에서 그치지 않았다. 많은 종류의 마스터 유전자들이 계속해서 보고됐다. 생물학자들은 벌레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들이 공통의 마스터 유전자 세트가 들어있는 ‘툴킷(tool kit, 도구상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진화의 가지에서 오래 전에 갈라진 동물도 거의 똑같은 툴킷을 공유하고 있어서 초파리 눈을 발생시키는 마스터 유전자를 쥐에다 넣어도 쥐의 눈이 정상적으로 만들어질 정도였다.

땜질하는 수선공, 자연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진 동물들이 거의 동일한 툴킷을 갖고 있다는 발견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다양한 형태는 다양한 유전자가 빚어낸 결과라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진화생물학자인 마이어가 “매우 가까운 동물들끼리가 아니고는 상동 유전자를 찾아봤자 소용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툴킷의 기능이 밝혀지면서 생물학자들은 형태의 다양성과 복잡성의 진화에 대해 새로이 접근했다. 생명의 블랙박스는 발생과 진화라는 반쪽짜리 열쇠가 합쳐지자 드디어 열리기 시작했다.
툴킷은 다른 유전자들의 작동을 조절하는 ‘스위치’를 끄고 켜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유전자 스위치는 DNA에 저장된 유전정보의 발현여부를 결정하는 조절단위다. 하나의 스위치는 여러 개의 툴킷에 의해 조절되는데, 툴킷이 단 500개 뿐이라도 조합을 통해 수많은 스위치들이 정밀하게 조절될 수 있다. 두 번만 조합해도 인간 유전자 수에 맞는 2만 5천가지, 세 번 조합하면 무려 1억 가지 이상의 조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각 스위치는 고유한 조합에 의해 조절되므로 같은 툴킷을 갖고도 동물종마다 스위치가 조절되는 방식이 달라짐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는 몇가지 색깔과 모양의 레고블럭으로도 엄청나게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진화는 레고블럭, 즉 툴킷이나 유전자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스위치를 켜고 끄는 방식을 조합해 무한히 다채로운 형태를 만들어 온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자콥은 『진화와 땜질』에서 자연을 “손에 닿는 재료들을 모아 뚝딱뚝딱 만들어낸 뒤 영겁의 시간을 거치며 끝없이 개량하고 고치는 수선공”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종의 기원’의 신비를 향한 긴 여정

이보디보라는 구원투수의 등장으로 생물학자들은 많은 형태들에 대한 명쾌하고도 ‘시각적인’ 설명을 내놓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보디보를 다윈 진화론의 완성판이라고 하기엔 아직 섣부르다. 장대익 교수는 “이보디보는 아직 유아기 단계”라며 “발생과 관련된 더 많은 유전자들과 그 유전자들이 이루는 네트워크를 밝혀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윈도 고민했던 이타적 행동이나 인간의 사회성 같은 복잡한 행동의 진화도 해결 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전중환 교수(경희대 학부대학)는 “이보디보의 영향으로 마음에 대한 ‘발생체계이론’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구체적인 실체를 잡기 어렵다”면서 “이보디보는 아직까진 진화심리학자들에게 많은 통찰을 제공해주는 정도”라고 말했다. 핀치 부리의 기원은 이제 거의 완벽하게 풀렸지만 아직도 ‘종의 기원’이라는 신비를 풀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 생물학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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