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 - 세미나11: 정신분석의 네가지 근본개념
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이라는 근본개념으로
‘프로이트 안의 프로이트 이상의 것’을 추구
『세미나 11』은 언어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혼합괴물

자크 라캉의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은 보이지 않지만 없다고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욕망한다. 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이라는 네 가지 근본 개념은 정신분석 ‘속’에서 정신분석을 ‘능가’하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발생한다. 국제정신분석 협회로부터 대파문을 당해 “완전히 (제도) 안에 있지도 그렇다고 밖에 있다고도 볼 수 없게”(p.14) 되었을 때 라캉은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한다. 제도 속에서 제도로 환원될 수 없는 정신분석의 타자성을 찾기 위해 그는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이 돌아가고자 하는 프로이트는 지젝의 말대로 “프로이트의 말(지식)이 아니라 프로이트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프로이트 역시 인식하지 못했던 불가능한 핵”이다. ‘프로이트 안의 프로이트 이상의 것’을 라캉은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는 네 가지 개념들을 통해 라캉은 “실천으로서의 정신분석”(p.19)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다.

실천이란 ‘상징적인 것을 통해 실재를 다루는 행동’(p.19)이다. 실재 역시 ‘상징계 안의 상징계 이상의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p.37)고 말했던 라캉은 지금 “무의식의 위상은 윤리적”(p.57)이라고 주장한다. 윤리적인 것은 언어의 타자를 지시한다. 무의식은 언어나 담론이 재현할 수 없는 간극이며 바로 이 간극을 통해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무의식은 상징적 담론’이라는 진술과 “무의식은 실재와의 만남”(p.40)이라는 주장은 그러나 단절이 아닌 ‘네 안의 너 이상의 것’(p.397)을 욕망하는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 실재는 상징적 담론의 틈, 구멍, 실패이지만 상징계의 결핍을 지시하는 요소들은 상징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나에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지요. 폴, 에르네스트, 그리고 나”(p.38)라고 말하는 꼬마의 셈법과도 같다. 셈하는 자가 이미 셈에 포함돼 있는 구조는 셈의 안이자 바깥인 주체가 셈을 불가능하게 하는 틈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빈 공간임을 보여준다.

라캉에 따르면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은 정상적인 시선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위 그림속의 해골처럼 삐딱하게 봐야만 또렷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인간의 욕망은 그처럼 터무니 없어 보일 정도로 기괴한 성격을 갖는다.
가능성과 불가능성, 부정과 긍정이 같아지는 빈 공간을 라캉은 원인(Cause)이라 부른다. 원인은 (상징적) 법으로 재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인 동시에 법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손자가 실이 감긴 실패를 던졌다 당겼다 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쾌락원칙을 넘어선 이론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프로이트가 이미 그 장면 안에 들어가 있듯이 (그는 이미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텍스트를 가지고 실패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다) 『세미나 11』이 보여주는 것은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의 상호함축 또는 ‘뒤엉킴’이다. 정신분석을 기초짓는 네 가지 개념 모두 같은 표면으로 계속 가다보면 이미 반대편에 와 있는 뫼비우스의 띠의 구조를 갖고 있다.

라캉은 무의식을 “공시태의 차원에 위치시켜야 한다”(p.46)고 말하는 동시에 “시간적인 박동 속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p.218)으로 제시한다. 시간을 알지 못하는 무의식과 기표를 선행하는 시간적인 박동(p.191)으로서의 무의식이 갖는 간극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다시 뫼비우스의 연결방식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라캉이 재현을 넘어선 위상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외상을 초래하는 실재와의 만남인 투케(tuche)는 기표의 공시성이 단순히 비시간적인 공시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표들의 네트워크인 오토마톤(automaton)은 이미 그것을 중지시키는 시간성으로서의 투케를 포함하고 있다. 상징적 오토마톤은 실재의 충격에 의해 구부러져 있는 것이다. 구부러짐은 투케가 상징계의 만곡을 초래하는 순수한 형식으로 이미 오토마톤 속에 기입되어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재현할 수 없는 빈 공간으로서의 투케와의 만남은 그러므로 항상 ‘어긋난 만남, 상실된 만남’(p.89)이다. 상징계의 연속성을 탈구시키는 이 어긋남이 상징계의 외상적 기원인 투케이다. 상징계의 자동성은 그것을 중지시키는 사건으로서의 투케를 포함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충동(drive) 역시 영원성과 시간성 ‘사이’에서 발생한다. 충동을 이루는 네 가지 요소 중 원천과 압박은 칸트의 예지계처럼 최초 대상의 비시간적 반복을 명령하지만 또 다른 두 요소인 대상과 목표는 충동이 이질적 문맥 속에서 재구성된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천과 압박이 구성하는 순환적 시간성의 축과 대상과 목표로 이루어지는 무한한 차이의 축이 단순한 대립이 아닌 ‘적대’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우리는 대립항의 강요된 선택이 아닌 내부 속에서 내부를 초월하는 외부를 말하고 있다.

주체의 형성을 설명하는 소외와 분리의 관계 역시 내재적 초월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의미를 얻기 위해 기표에 종속되는 소외와 기표 체계 자체로부터 떨어져나감으로써 비로소 자유의 가능성을 얻는 분리는 대립이나 차이 이전에 이미 겹쳐 있다. 라캉은 “주체는 타자의 장에 공시적으로 종속될 때에만 주체일 수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그 곳을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한다.(p.285) 주체의 빠져나옴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타자의 결핍이다. 결국 소외와 분리의 겹침 또는 뒤엉킴은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이 겹치는 이중 결핍의 공간 즉 대상 a의 공간을 열어놓고 바로 여기서 분리의 주체는 대상 a의 위상을 갖게 된다. 의미를 박탈당한 대상, 배설물과도 같은 대상이 바로 주체이다. 그러므로 주체의 진실은 “주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주체 자신이 아니라 대상 속에 있다.”(p.17)

자연적인 성도 문화적인 젠더도 아닌 성욕은 외상을 초래하는 충동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p.267) “무의식의 현실은 성적 현실이다.”(p.226) “시니피앙이 세상에 도입된 것은 성욕을 통해서이다.”(p.228) 기표의 (불)가능 조건으로서의 성욕은 그러므로 타자의 결핍, 타자의 욕망을 드러낸다. 사실 응시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타자의 눈멂이다. ‘깡통은 자네를 보고 있지 않아’(p.149) 깡통은 내가 그것을 보기 전에 이미 나를 보고 있지만 그러나 응시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대타자의 눈이 아니라 눈먼 부분대상이다. 그러나 바로 이 눈멂이 주체와 타자 모두를 거세시킨다.

‘라캉 안의 라캉 이상의 것’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하나의 라캉이다. 기표로서의 라캉은 대상 a로서의 라캉과 겹쳐 있다. 대상a 로서의 라캉은 기표 속에서 기표를 능가하는 잉여물로 남아있다. 이 잉여물과의 만남이 윤리학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혼합괴물과도 같은 『세미나 11』의 라캉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물음으로 우리를 혼돈스럽게 한다. ‘정신분석이란 스핑크스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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