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너무나 다채로운 면모를 가진 천재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회학의 방법을 모색했고, 『사회계약론』을 통해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의를 천명했으며, 『에밀』을 통해 교육철학에 한 획을 그었고, 『고백록』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자서전이라는 문학 장르를 창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루소가 일류 식물학자이자 『마을의 점쟁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해 프랑스 국왕의 연금을 받을 뻔했던 탁월한 음악가였을 뿐만 아니라 『신엘로이즈(Julie ou la Nouvelle Heloise)』라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쓴 작가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루소의 다양한 모습들 중 일부에 편중된 번역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번에 서익원 교수(경원대 불어불문학과)의 『신엘로이즈』 완역본이 출간됨으로써 그동안 우리들에게 가려져있던 루소의 한 면모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루소는 무엇보다도 『신엘로이즈』를 통해 문학적 영광의 정점에 이른다. 루소의 다른 글들이 주로 일부 식자층에서 읽혔다면 이 소설은 매우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면서 18세기 말까지 적어도 70판이 출판됐는데, 이는 그야말로 유례 없는 성공이었다. 그렇다면 『신엘로이즈』가 이러한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 작품은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왜냐하면 8백여쪽에 이를 정도로 분량이 많았고 사건들도 거의 없는데다가 결투, 대도시 파리의 풍속, 음악, 교육, 종교 등 일반적인 주제들에 대한 긴 논술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자신을 작품의 주인공들과 동일시하면서 책에 빨려들어 갔다. 거기에 담겨있는 열정은 너무나 격렬해서 당대의 한 평론가는 글이 쓰인 종이를 불태울 정도라고 외쳤고, 낭만주의를 주도했던 스탈 부인은 루소가 선량한 풍속을 해치는 연애소설을 써서 미덕을 손상시키기는커녕 미덕에 상상적인 매력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열정으로 만드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찬양했다. 그러나 당대 독자들이 열광한 사랑과 미덕을 향한 열정이 현대의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감정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수 있다. 루소의 어투를 흉내 내자면 ‘진지한 사랑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이 책을 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루소가 사랑에 부여한 새로운 의미다. 루소에게 사랑은 관능의 충족을 넘어서 미덕을 지향하는 힘이며,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미덕의 화신으로 이상화한다. 그는 사랑에서 모든 것, 가령 사랑할 때 일어나는 모든 감정 등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지만 그 환상이야말로 인간을 가치의 세계로 고양시키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미덕은 실천하기 어렵지만, 사랑하는 대상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미덕을 실천할 때 그로 인해 받는 물질적 고통은 달콤한 사랑으로 상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민인 생 프뢰와 귀족 출신인 쥘리는 그들의 사랑이 사회 질서와 충돌하면서 미덕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둘의 관계를 눈치 채고 애태우던 쥘리 어머니의 죽음이 한 예인데, 어떻게 보면 쥘리는 사랑 때문에 어머니를 죽인 셈이 된다. 만약 쥘리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 프뢰와 결혼했다면 그녀는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사랑을 파괴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미덕을 추구하는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허락된 사랑의 형식은 그리움뿐이고, 미덕이야말로 내세에서 이 둘을 맺어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런데 쥘리의 남편인 볼마르는 그들이 앓는 사랑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생 프뢰에게 자신의 영지인 클라랑에 와서 살라는 제의를 한다. 유물론자이자 이성의 화신인 볼마르는 과거의 쥘리와 현재의 볼마르 부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두 사람에게 일깨우려고 그들에게 자기가 없는 상태에서 입맞춤을 하도록 강요한다. 볼마르의 방법은 쥘리와 생 프뢰가 서로에게 사랑과 존경의 시선을 보낼 때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게 하려는 것으로, 사실 이것은 ‘클라랑의 질서’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행복을 향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클라랑의 질서는 실상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전방위 감시체제’에 기초를 두고 있어서, 하인들은 주인의 이익을 위해서 항상 서로를 감시해야만 한다. 볼마르가 감시하는 시선이 내면화될수록 이 두 사람은 활기를 잃어버리고 쥘리는 일상적인 행복에서 생겨나는 권태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클라랑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이었던 감시 체계의 효율성이 결정적으로 의문시된다. 쥘리가 느끼는 권태감은 자신이 자율적이라고 느끼지만 실상은 세밀하게 통제 받는 클라랑 사람들의 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가능한 결말은 쥘리가 죽는 것이고, 그래서 그녀는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러 물에 뛰어 들어가 아이는 구하지만 자신은 죽을 병에 걸린다. 그녀는 생 프뢰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아이들의 교육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죽음을 맞는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두 연인은 그동안 겪어야만 했던 모든 고통을 보상받고 심원한 존재 이유를 되찾는다. 쥘리는 미덕으로 인해 받은 고통 덕분에 자신의 사랑을 부끄러움 없이 고백할 수 있었고, 생 프뢰는 지금까지의 고통을 쥘리의 사랑 고백으로 보상받았으며 또 내세에서 쥘리를 만날 희망을 갖고 앞으로 미덕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돼서 사람의 내면을 직접 느끼고 싶다는 쥘리의 희망과 미덕을 실천하는 자신의 내면을 쥘리가 그대로 느꼈으면 하고 바라는 생 프뢰의 희망은 그 강렬함으로 이미 죽음을 넘어 둘을 하나로 만든다.

계몽주의자들이 신성을 탈신비화했다면 루소는 이렇게 세속적인 사랑을 신비화하면서, 당시 형성 중인 부르주아 사회를 위해 혹은 그 사회를 견뎌내기 위해서 새로운 사랑의 신화 혹은 종교를 창조한 것이다. 이성적이고 명석한 프랑스어를 몽상과 열정의 언어로 변형한 루소의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 지나친 직역 때문에 따라 읽기 힘든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공들인 번역을 내놓은 역자의 노고에 루소 전공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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