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관기] 한국번역학회·통번역연구소 공동학술대회

김순영 교수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지난달 25일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서 한국번역학회와 한국외대 통번역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국내 최대의 순수 번역학 학술단체인 한국번역학회와 국내에서 가장 먼저 통번역 교육을 시작해 올해로 개원 30주년을 맞은 한국외대 통번역연구소가 함께 모인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번역에 대한 이론적 고찰에서부터 번역전략, 교육, 평가, 번역 메모리, 불경번역에 이르기까지 최근 국내 번역학 연구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총 17편의 연구결과들이 발표됐다.

학술대회는 전성기 교수(고려대 불어불문학과)의 ‘탐구번역론-하나의 인문학 번역론’이라는 발표로 시작됐다. 전성기 교수는 탐구정신과 인문정신이 결여된 채 ‘조건 반응’으로서의 번역 상태에 답보해 있는 인문학 번역에 대해 탐구번역론을 가능한 해법의 하나로 제시했다. 그는 번역론과 번역비평론이 탐구·발견·비판을 통해 조화롭게 공존하며 작용할 때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후의 세션은 세 개의 분과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오전 세션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프랑스 명작소설 번역평가: 문제와 쟁점’이라는 주제로 이영훈 교수(고려대 불어불문학과)가 발표한 프랑스 고전 번역평가 방안에 대한 논의였다. 이 발표에서는 기존에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에서 실시했던 영미명작 번역평가와의 차별성, 평가에 참여하는 연구원들 간에 발생할 수 있는 평가기준에 대한 견해 차이,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는 번역가의 작품을 평가 대상으로 삼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 출판사와의 미묘한 권력 관계 등 다양한 관점의 토론과 질의응답이 이어져 번역평가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오후 세션 역시 세 개의 분과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전주 ‘경기전(慶基殿)’ 경내 안내판의 오류를 일일이 분석해 보고한 최희섭 교수(전주대 언어문화학부)의 발표를 비롯해 번역교육의 문제점 및 해결 방안, 영한번역에서의 구체적 번역전략 개발, 통번역 능력 습득, 번역투, 불경번역에 대한 통합적 접근법 등 구체적인 번역전략과 학습전략에 대한 논의와 제안이 각각 이뤄졌다.

필자가 머물렀던 발표장에서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최승권 연구원의 ‘번역 메모리의 구조화 연구’와 이근희 교수(세종대 영어영문학과)의 ‘스코포스 이론의 관점에서 본 자국화 번역 전략(사례 연구-더빙 영화 「빨간 모자의 진실」)’이 각각 발표됐는데, 소프트웨어의 힘을 빌려 표준화된 번역을 모색하고자 하는 기술적 시도와 여러 유형의 번역 방법 중에서 원전에 대한 충실성을 유지하기가 가장 어려운 영화번역에 대한 논의가 한 자리에서 이뤄지게 된 우연 아닌 우연이 흥미를 더했다.

이근희 교수의 발표에서는 원문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잣대만으로 모든 번역 결과물을 비평하는 일은 온당치 못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원문의 대사를 직역하지 않고 국내 관객들에게 익숙한 유행어와 속담, 한국적 문화가 반영된 사투리, 신조어의 삽입 등을 통한 자국화 번역으로 흥행에 성공을 거둔 영화 「빨간 모자의 진실」에 대한 사례연구 결과가 보고됐다. 이근희 교수는 이 작품이 성공적인 자국화 번역 전략의 전형이라 평했으나 자막 혹은 더빙 시 발생하는 시·공간적 제약, 이 작품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영화였다는 점, 작품 전체에 일관되게 자국화 번역 전략이 사용된 것은 아니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리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했다. 특히 발표자도 언급했듯이 같은 작품에 대해 충실성의 결여를 이유로 혹평한 연구자가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원문에 대한 충실성을 택할 것인가, 독자의 입장에서 읽기 쉬운(듣기 쉬운) 자국화 번역전략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쉽게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말뭉치 자료를 활용한 조의연 교수(동국대 영어영문학과)의 인지화용적 관점에서 본 번역현상에 대한 설명과 영어 전치사 ‘of’의 영한번역 양상을 토대로 번역에 대한 학제 접근을 모색한 임어경 교수(부산대 언어정보학과)의 발표를 끝으로 학회는 막을 내렸다. 오전 세션이 번역의 정체성, 번역 불가능성의 문제, 번역 품질 평가 등 번역과 관련된 보다 근본적이고 태생적인 문제들을 다뤘다면 오후 세션에서는 번역오류, 번역교육의 문제, 학습전략, 번역전략 등 보다 구체적인 주제들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무엇보다도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기존의 순수 이론중심 연구에서 벗어나 번역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제 문제들을 학문적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이었다. 지시관형사의 변환 현상, 스코포스 이론의 적용이라는 미시적 접근에서부터 번역의 정체성 나아가 인문학적 번역론이라는 거시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국내 번역학 연구의 전 분야를 망라한 다양한 논문들이 발표되고 뜨거운 토론이 이뤄졌던 이번 학술대회는 한국 번역학 연구의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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