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동향] 로컬리티 인문학

2007년 말부터 시작된 ‘로컬리티 인문학’ 프로젝트는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추진 중인 인문한국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10년간 총 100여억 원의 지원을 받는 부산대 로컬리티 인문학 연구소(이하 연구소)의 우선 과제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로컬리티를 발견하고 로컬리톨로지(로컬학)를 세우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최근 연구소는 ‘탈중심성의 로컬리티’라는 주제로 2월 25일부터 4월 22일까지 콜로키엄을 여는 등 로컬리티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로컬리티 인문학의 ‘로컬리티’는 열린 개념=로컬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전체 체제 단위의 하부에 위치하는 국지적인 영역을 뜻하는 말이다. 학문 분야에 따라 지역이나 지방으로 주로 사용되기에 연구소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지역이나 지방이라는 용어보다는 로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로컬리티 인문학은 기본적으로는 로컬을 국가 단위 하부에 존재하는 국지적 영역인 지방으로 여기지만 로컬의 주변성만이 아니라 로컬 그 자체로서의 장소성과 정체성, 다양성이 발현되는 장이라는 점을 수용한다. 중심-주변의 수직적 의미의 지역이 아닌 ‘수평적 의미의 지역’이라는 개념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로컬리티 인문학은 로컬과 관련한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한 장소에 타자성, 소수성, 문화적 다양성 등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를 포괄한다. 이상봉 교수(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는 “지역으로서의 로컬리티는 중심-주변의 구분으로 인해 생기는 차별, 배제의 문제까지는 포착해 낼 수 없다”며 “로컬리티의 인문학적 측면에 주목하는 점에서 연구소는 이런 지점까지 문제의식을 확장하려 한다”고 말했다.

◇근대와 탈근대에 걸친 로컬리티=로컬리티 인문학의 명확한 학문적 범주를 정하기 위해 연구소는 최근 ‘로컬리티의 안과 밖, 소통과 확장’이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로컬과 로컬리티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한 바 있다.

현재 정치학, 지리학 등에서는 아시아, 유럽 같은 단위를 로컬이라 칭한다. 또 남미와 스칸디나비아 등 특정 지역의 역사, 문화적인 동질성을 로컬리티라고 규정한다. 연구소에서 규정한 로컬과 로컬리티의 범주 및 속성과는 다른 의미로 통용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승환 교수(충북대 국어교육과)는 “원래 로컬리티라는 개념은 동아시아문화권 등 문화적인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 국가 내에서의 로컬리티는 성립할 수 없다”며 “현재 연구소에서 주장하는 로컬리티 개념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로컬리티 인문학이 본래 의도한 방향대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로컬리티 인문학은 다수에 의한 소수의 억압을 경계한다. 그러나 로컬리티 자체의 상대적인 속성 때문에 로컬리티 인문학은 또 다른 억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김 교수는 “상대적 개념인 로컬리티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대성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것도 주체와 관점에 따라서 하나의 권력적 담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산성(性), 전주성(性)이라 할 때 이들도 모두 로컬리티가 될 수 있고 이들 안에서도 또 다른 로컬리티가 생겨날 수 있는데 이들 간에도 권력적 위계 관계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탈근대적 관점에서의 로컬리티뿐만 아니라 근대적 의미로서의 로컬리티 자체가 지닌 억압적인 성격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현재 통용되는 로컬리티나 지역이라는 개념은 근대의 산물이기에 그 속에는 폐쇄적, 배타적인 관점이 여전히 남아 있어 로컬리티를 무작정 탈근대적 관점에서만 논의할 수 없다. 안영진 교수(전남대 지리학과)는 “연구소는 로컬리티를 탈근대적인 맥락에 놓고 이를 아주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우리가 로컬리티를 담론화 할 수 있는 것은 근대성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역동적인 사회변화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로컬리티를 근대와 탈근대에 걸친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을 대안으로 생각해볼만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로컬리티 인문학의 개념은 아직 애매모호하고, 기존 범주를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는 ‘탈경계’ 논의와 별다른 차별성을 두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연구소는 1980~90년대 초반에 이뤄진 영미권의 로컬리티 연구 동향을 우선 분석하고 있다.

◇영미권의 초기 로컬리티 연구에 주목하는 연구소=로컬리티 연구는 1970년대 이후 서구 자본주의 국가, 특히 영국에서 진행된 사회겙姸?공간의 급속한 변화를 해명하고 변화에 따른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찾기 위해 이뤄졌다. 당시 로컬리티 연구의 토대를 이뤘던 이론은 구조화론과 실재론이다. 구조화론은 구조와 행위가 상호작용하는 측면에서 사회를 설명하려는 이론인데, 사회와 시공간이 만나는 장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 로컬이며 이후 로컬리티와 관련된 논의가 진행됐다. 실재론은 상반되는 두 실체인 이론과 경험, 추상과 구체, 필연과 우연 등을 구분해 그 둘의 격차를 비판하고 타파하려 노력한다. 이런 이론적 틀을 만드는 작업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입장을 취하는 사회이론가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사회와 공간을 분리해서 보지 않고 상호관계하는 하나의 존재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사회와 공간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문화, 장소, 성, 민족 등의 요인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박규택 교수(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는 “로컬리티 인문학은 서구 중심의 거대 담론과 국가 중심주의에 근거한 근대의 인문학을 발전적으로 해체한 뒤 로컬과 로컬리티의 시선에서 인문학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한다”며 “영미권에서 진행된 로컬리티 연구자료를 축적하는 작업은 로컬리티 인문학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세봉 교수(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는 “로컬리티 인문학이 명확한 로컬리티 개념을 세우지 못할 경우 소위 ‘잡탕’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개념 성립에 관한 우려를 내비쳤다. 로컬리티 인문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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