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서평] 창비담론총서 시리즈


그래픽: 안하영 기자

이승주 교수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지난 60여년 간 한국 사회의 주요 갈등 축이 됐던 문제의 기원과 그 현재적 영향을 다각도로 다룬 창비담론총서 『이중과제론』, 『87년체제론』, 『신자유주의 대안론』이 동시 출간됐다. 이 세 권의 책은 문제의식을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가운데 주장, 논지의 강조점, 대안의 제시 등의 측면에서는 상당히 차별적이다. 저자들은 각 권의 책에서 규명된 문제점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 다양한 갈등을 초래하는 문제의 근원인 동시에, 향후 한국이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도전 대상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반면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진단에서는 미묘하지만 중대한 초점의 차이가 발견된다. 『이중과제론』은 분단체제의 성립과 고착화를, 『87년체제론』은 민주화와 자유화 프로젝트의 가동과 미완적 달성을, 『신자유주의 대안론』은 신자유주의의 수용과 확산의 한국적 맥락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갈등과 문제의 근원으로 진단한다. 이 같은 공통성과 차별성의 조합은 개별 저서 내에서도 나타난다. 이중과제의 구체적 대안 전략의 효용성을 둘러싼 백낙청과 김종철의 논쟁이나 87년체제의 현재적 영향력에 대한 김호기와 조희연의 견해 차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조화와 긴장의 절묘한 조합만으로도 이 세 권은 ‘총서 시리즈’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중과제론 이남주 엮음┃283쪽┃1만원
87년체제론 김종엽 엮음┃277쪽┃1만원
신자유주의 대안론 최태욱 엮음┃321쪽┃1만원
그렇다면 세 권의 책을 관통하고 있는 공통의 문제의식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세 권의 저자들이 각각 초점을 맞추고 있는 문제점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와 관계가 있다. 각각의 책에서 지적된 세 가지 문제는 일견 한국 사회에 순차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저자들은 이러한 단계론적 인식을 경계한다. 세 가지 문제가 시차를 두고 순차적인 영향력을 미쳤다기보다는 현재 한국사회에 중첩적, 복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97년의 금융위기가 ‘민주화, 권위주의체제의 엘리트들이 시도한 자유화 프로젝트, 경제정책 영역에서 국가의 후퇴’로 인해 발생했으며, 따라서 금융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문제는 87년체제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87년체제 내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김종엽, 『87년체제론』).

이렇게 볼 때 저자들이 지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선진화론’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은 단순히 자신들의 주장과 선진화론의 주장이 지향하는 지점 사이에 메우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인식론의 근본적 차이가 양자의 불편한 관계를 조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인 것이다. 즉,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중첩적 인식론을 공유하고 있는 저자들의 눈에는, 선진화론이 한국 사회의 변화를 단계론적으로 인식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제문제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선진화 담론의 주창자들은 결정론적인 단계론에 입각해서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 단계론의 문제점은 그것이 일단 강력한 배제의 논리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 기계론적 단계론을 적용해서 역사를 인식하는 것은, 과거를 현재에 종속시키는 것으로서 역사인식의 협소화를 가져온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홍석률, 『이중과제론』).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현재의 한국 사회에 중첩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분석하려는 저자들의 시도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한다는 면에서 환영할 만하다. 다만 이러한 시도가 구체적인 경험적 분석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국 사회의 각 분야를 시공간적으로 다양하게 조망하는 풍부한 경험적 분석이 더해진다면, 저자들의 주장은 담론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분석틀로서의 효용성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한편 세 권의 책은 대안 제시의 구체성과 과단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87년체제론』은 대안 탐색보다는 주로 문제 진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이중과제론』은 근대 적응을 위해서는 ‘적당한 경제성장’과 ‘자기방어적 성장’ 그리고 근대 극복을 위해서는 연합제 또는 연방제와 같은 ‘복합국가’ 수립이라는 이중 전략을 대안으로 제안한다(백낙청, 『이중과제론』). 책의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신자유주의 대안론』은 대안 모색에 가장 적극적이다. 이 책은 세계화가 신자유주의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도 성장과 분배를 양립 가능하게 하는 민주적 시장경제 모델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유종일, 『신자유주의 대안론』), 이를 위해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 활성화와 비례대표제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최태욱, 『신자유주의 대안론』). 더 나아가 한국이 ‘비자주적, 반민중적 제도’를 최소화해 신자유주의를 수용한다면 다른 개도국에게 전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백낙청, 『신자유주의 대안론』).

사회적 양극화, 분배 갈등,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이원화된 노동시장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한국 사회에 초래한 문제 해결의 시급성과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유효성에 대한 총체적 재평가의 필요성을 고려하면 이런 다각적인 대안 제시는 시의적절하다. 그러나 위 대안들이 현실성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실행 계획의 순서가 함께 제시돼야 한다. 즉, 실현 가능성을 감안할 때 저자들이 내놓은 대안들은 중장기적 과제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단기적으로 해야 할 실천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정책과 이념에 기반을 둔 정당체제의 형성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되기 어려운 현 시점에서 성장과 분배의 개선을 위해 단기적으로 실천해야 할 과제와 중장기적 목표 사이의 로드맵을 그리는 작업이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저자들이 제시한 대안들을 독자들이 현실성 있는 ‘실천적’ 대안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는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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