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목소리]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석학강좌

“라틴아메리카 하위주체 연구,
학제 연구로 새 모델 창출하고
국가와 하위주체 ‘대립’보다
‘화해’에 초점 맞춰야 할 것”


라틴아메리카 하위주체 연구 권위자인 존 베벌리 교수
사진: 황율리 기자

지난 13일(수) ‘라틴아메리카니즘이라는 사건: 인식 지도 그리기’라는 주제로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석학강좌가 열렸다. 라틴아메리카니즘은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 담론과 이 담론이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하게 서구 중심적임을 지적하는 비판적 담론 모두를 지칭한다. 이날 존 베벌리 교수(미국 피츠버그대 스페인어과)는 라틴아메리카니즘을 성찰하고 이를 ‘분홍 물결’이라는 정세 속에서 살펴봤다.

라틴아메리카니즘은 제3세계에서 탈식민운동이 일어나면서 등장했다. 1990년대에는 라틴아메리카니즘 내부에서 ‘증언서사(Testimonio)’가 등장해 하위주체(Subaltern)의 경험에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이를 증언서사의 ‘현실효과’라고 하는데 이후 여러 모순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베벌리 교수는 “증언서사에 서술자의 주관이 과도하게 개입돼 하위주체를 왜곡할 수도 있다”면서도 “하위주체와 지식인이 협력한다는 점에서 좌파 정당의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는 상대적으로 다원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성향의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런 현상을 의미하는 ‘분홍 물결’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분홍 물결처럼 하위주체가 헤게모니를 잡아도 지배, 피지배 구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며 “평등주의적, 다문화적 성격을 지닌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벌리 교수는 라틴아메리카 하위주체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붐 소설(20세기 후반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 문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카를로스 푸엔테스,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 거장들의 작품을 일컫는 용어)’이 지배 엘리트의 예술일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증언서사의 진정성과 혁명성을 부각시켜 주목을 끈 바 있다. 『대학신문』은 베벌리 교수를 만나 라틴아메리카 연구에 대해 들어봤다.

◇한국에서 강연회를 열게 된 계기는?
주로 남반구에 몰려 있는 제3세계는 북반구에 위치한 제1세계 국가들에 의해 정보가 여과되는 경우가 많다. 남아시아 연구를 하면서 라틴아메리카가 다른 제3세계 국가와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 남(南)과 남(南)의 관계에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강연도 그 소통의 일환이다.

◇라틴아메리카 하위주체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80년 니카라과라는 국가의 산디니스타 좌파조직에 경도돼 이를 연구했다. 그러나 1990년 산디니스타 정권은 기대와 달리 대선에서 패배했다. 한정된 계급을 위한 니카라과 혁명은 한계가 있었다. 변화된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을 찾는 도중 인도 하위주체 연구를 접하게 됐다. 인도 역시 좌파개혁이 실패했고 하위주체가 사회의 주를 이루는 등 라틴아메리카와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인도의 분석틀을 라틴아메리카에 적용해보고자 했다.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저널리즘과 증언서사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하위주체는 문맹인 경우가 많아 그들의 목소리를 지식인이 대신 전해준다. 저널리즘에서는 기자가 하위주체를 3인칭으로 서술하지만 증언서사에서는 하위주체가 1인칭으로 나타난다. 하위주체의 목소리가 더 생생히 전달되지만 그만큼 지식인은 그들의 목소리를 왜곡하지 않고 온전히 전달해야 한다.

◇중심국인 미국의 엘리트 지식인이 라틴아메리카를 연구하는 것은 제1세계의 학문 헤게모니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비판이 있다.
비판은 일면 타당하나 미국과 미국 내 진보세력은 구분해야 한다. 과거 미국은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칠레 등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고 군부정권에 의한 고문과 납치가 만연했다. 반면 미국 내 진보진영은 그들의 탈출과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현재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진영은 그들의 활동이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연구를 할 계획인가?
나는 곧 은퇴하지 않을까(웃음). 젊은 학자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하위주체가 정치주체가 돼 가는 상황에서 국가는 민중을 억압한다는 기존의 진보 입장에서 벗어나 정부와 하위주체의 ‘화해’에 초점을 맞출 것을 주문하고 싶다. 현재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이 각 분과학문의 틀 속에서 연구하는 추세인데 한 분야에만 매몰될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학제 연구를 통해 새로운 모델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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