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모양이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소록도. 1912년 일본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한센병이 전염된다는 이유로 한센인들을 소록도에 강제 격리시켰다. 육지와 거리가 가까워 물자운송이 쉽다는 이유로 소록도가 격리장소로 선택됐고 격리된 후 한센인들은 강제노역과 정관수술 등 인권유린을 당했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섬 안의 메아리가 돼 허공에 맴돌 뿐, 수 십 년 동안 고통 받은 채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아픈 과거를 지닌 섬 소록도. 과거의 상처를 안은 채 9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소록도는 어떤 모습일까. 『대학신문』은 한센인들의 한이 서려 있는 소록도를 찾아갔다.


전동차를 타고 가는 한센인을 소록도를 찾은 방문객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진: 이다민 기자 aasterion@snu.kr

소록도를 찾기 위해 서울에서 버스로 6시간 30분이 지나 도착한 녹동버스터미널. 예전에 소록도에 가려면 녹동터미널에 도착한 후 배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했지만 이제는 소록대교가 놓여 버스로 이동할 수 있게 됐다.

식사를 마친 중앙리 주민들이 마을 입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소록도의 자원봉사자들

소록도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소록도병원과 일반인에게 개방된 중앙공원 그리고 한센인의 보금자리인 한센인 마을로 나뉜다. 소록도가 일반인에게 완전히 개방되지 않은 이유는 한센인 환자와 소록도주민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소록도에는 한센인과 그들의 손, 발이 돼 모든 생활을 같이하는 자원봉사자가 함께 살고 있다. 노란 조끼를 입은 개인봉사자, 파란 조끼를 입은 단체봉사자는 쉴 틈 없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자원봉사자들은 그들 없는 소록도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록도에 들어와 많은 일을 한다. 최소 2주라는 짧지 않은 봉사 기간에도 멀리 소록도까지 찾아와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들. 35명 정도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은 일상생활 도우미 격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용변, 식사, 운동, 목욕 등을 돕는다.

2년 전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처음 시작했다는 천소미씨(샌프란시스코대 생물학과·23)는 “처음에는 신부님이신 큰아버지의 소개로 오게 됐다”며 “봉사활동을 하면서 같은 봉사자들끼리 친분도 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가 바뀌고 찾아와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반갑게 맞아주셔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국립소록도병원 자원봉사지원센터 여동구 자원봉사계장은 “병원 업무 외에도 마을에 사시는 독거노인 분들을 돌봐 드려야 하기 때문에 그분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것 또한 중요하다”며 “짧지 않은 봉사 기간인 만큼 이곳에 지원한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봉사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연간 소록도를 찾는 자원봉사자 수는 2만명 정도. 전체 봉사자수인 2만명은 적은 인원은 아니지만 단체봉사활동 및 개인봉사활동이 방학기간에 몰려있고, 단발성 봉사활동에 그치기 때문에 실제 봉사자 수는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소록도 병원과 7개의 마을

소록도의 아침은 다른 곳의 아침보다 더 빨리 찾아온다. 새벽 5시. 소록도병원은 식사를 준비하는 이들로 분주하다. 4개의 병동으로 돼 있는 소록도 병원은 내과병동, 외과병동, 정신과병동, 노인병동으로 나눠져 있다.

다른 병동과는 다르게 정신과병동의 환자들은 신체적인 장애는 크지 않기 때문에 몸이 불편하지 않은 한센인은 다른 한센인의 밥을 챙기기도 한다. 노인 병동에서는 숟가락을 들 힘도 없는 이들과 신체 일부가 손상된 이들이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 한센인은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자원봉사자 안성훈씨(목포가톨릭대 간호학과·24)는 “한센인이라는 것만 빼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와 전혀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기자는 환자들의 아침식사 수발을 마친 자원봉사자들을 따라 마을로 나섰다. 소록도는 소록도병원을 중심으로 중앙리, 신생리, 새마을, 녹색리, 남색리, 동색리, 구북리 7개의 마을로 나눠져 있다. 혼자 생활할 수 없는 한센인들은 병원에 입원해 있고 혼자 생활이 가능한 한센인은 각 마을에서 생활한다. 기자가 제일 먼저 찾은 마을은 중앙에 자리 잡은 중앙리다. 중앙리를 비롯해 소록도 곳곳은 시설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주민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려 낙후된 시설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고 있다.

중앙리에 거주하는 한센인 강금순씨(72세)는 “예전에는 봉사자도 뜸했고 아궁이 시설도 오래돼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많이 나아졌다”며 “나라에서 가스레인지도 설치해주고 냉장고와 보일러가 들어와 편해졌다”고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이처럼 현재 소록도 주민들은 새로운 시설과 지원으로 안락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또 현재 소록도의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장기를 두거나 밭을 일구고 가축을 키우는 등 여느 시골의 풍경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평온을 유지하기까지 소록도는 많은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과거가 있었다.

노인병동의 한센병 환자가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운동을 하고 있다.

◇과거 소록도의 상처

일제강점기 한센인들은 부당하게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1933년 소록도병원의 3대원장이었던 스오 마사히데 원장은 연간 140만장의 벽돌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벽돌공장을 세웠고, 이 때문에 한센인들은 벽돌 제조, 자재 하역, 골재 운반 등 힘들고 험한 공사에 동원됐다.

또 1937년 중일전쟁 탓에 한센인들의 생활이 굶주림과 강제노동으로 피폐해졌지만 수용시설과 도로를 건설하는 등 대형공사에 동원해 이중삼중의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때 핍박받았던 주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신생리 마을이다. 이근분 할머니(80세)는 “내가 소록도에 처음 온 게 1941년 이였는데 그때 당시를 생각하면 끔찍할 정도”라고 울먹였다. 이어 그는 “일본 군인들은 한센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을 뿐 만 아니라 아픈 사람을 데려다 쉴 새 없이 일을 시켰다”고 말했다. 그 당시 벽돌 나르는 일을 했던 이근분 할머니는 강제노역 중 빠져버린 손톱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처럼 소록도에는 아직도 일본의 핍박으로 상처받은 한센인들이 많다.

2006년 일본은 한센인에 대해 사과와 일부 보상을 했지만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인 중에는 일제시대 직접적 피해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상대상에서 제외된 이들도 많다.

◇소록대교 그 이후

지난 3월 일반인이 소록도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소록대교가 개통됐다. 소록대교의 등장으로 하루 평균 소록도의 중앙공원을 찾는 이의 수만 200명을 웃돈다. 관광객 이태규씨(충남 부여·30세)는 “한센인들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 정작 그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모두가 무관심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매일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들의 역사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인식을 바꿔나가고 있다.

하지만 소록대교의 개통은 한센인에게 새로운 불편을 가져다 줬다.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인 환자는 “예전에는 배가 들어와서 전동차에 탄 상태에서 바로 배에 올라타면 곧장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며 “소록대교가 생겨서 배가 운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소록대교에는 전동차가 다닐만한 인도가 없어 도로를 이용해야만 한다”고 토로했다. 소록도에는 전동차를 이용하는 한센인이 많음에도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아 한센인들이 겪는 불편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또 방문객의 출입이 늘면서 면역력이 약한 그들의 건강 체계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신종인플루엔자 등 각종 전염병의 홍수 속에 그들의 생활터전으로 들어선 일반인이 질병을 옮기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해 독감이 유행해 한센인 환자가 외부인에 의한 감염으로 숨지기도 했다.

이외에도 소록도 출입이 자유로워지면서 외부인이 무단으로 한센인거주지에 들어와 도난 등의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로서 약자인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대로 된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국립소록도병원에서 한 자원봉사자가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모습이 보인다.

◇한센병에 대한 인식은?

현재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한센병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록도에 거주하는 주민 모두는 한센병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 양성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소록도를 방문한 관광객들은 한센인과 접촉을 과도하게 꺼리거나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소록도병원 박재우 피부과장은 “한센병은 양성환자와 음성환자로 나뉘는데 현재 우리나라에 양성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사람들 대부분은 한센병에 대한 면역체계가 갖춰져 있을 뿐 아니라 한센병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감염되지 않는 3군 전염병”이라고 설명했다. 일본강점기부터 오해와 편견 속에 자리 잡은 한센인은 제대로 된 사실확인 없이 위험한 존재로 자리 잡았을 뿐이다. 3년 동안 소록도를 떠나지 않고 봉사활동을 계속한 자원봉사자 한훈씨(40세)는 “그들은 두렵고 피해야 할 존재가 아닌 우리가 보살피고 감싸줘야 하는 존재”라며 “아직도 우리사회에 팽배해 있는 오해와 편견을 없애기 위해 국가차원의 지속적인 홍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기자의 눈으로 본 소록도는 핍박받고, 격리됐던 과거의 상황보다 확실히 나아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기 위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변한 것 없이 같은 자리에 있는 그들. 그들에게 필요한건 우리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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