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책의 운명이 인간의 운명을 만들어가는 현장’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 책을 집필했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책이 쓰인 동기부터 시작해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보존되는 모든 과정을 책의 관점에서 바꿔 말하면 이는 곧 ‘출생-성장기-청·장년기-노년기’나 다름없다. 이러한 책의 ‘전 생애’를 여러모로 둘러보면 책의 내용만 이해할 때보다 당대 현실과 사상이 훨씬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저자는 조선시대 지식인의 서가에 죽은 듯 꽂혀 있던 27권의 책들의 전 생애를 밝혀내 그것에 숨을 불어넣었다. 5년 전 계간지 『북 앤 이슈』에 연재했던 글들을 다시 다듬어 이 한 권으로 묶어낸 것이다.
시간가는 줄 모르게 빠져드는 소설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은 조선시대 지식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첫 장에서 저자는 그들이 탐독했던 귀신 전기(傳奇)집 『전등신화』의 재미있는 내용뿐만 아니라 책의 숨은 배경까지 주목한다. 귀신이 등장하는 비현실 세계는 인간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작자가 처한 현실 및 그의 세계관이 투영된 세계다. 또 조선 지식인들이 귀신을 무서워하면서도 귀신 이야기를 선호한 것은 ‘이계(異界)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라는 인간 본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이렇듯 저자는 각 책의 뒷 배경을 나름의 시각으로 분석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와 함께 나머지 26권의 책의 생애를 좇다 보면 당대 현실과 지식인의 사상이 마저 그려진다. 조선시대 서당에서는 어린 인재들이 『맹자』를 읽으며 유교사상에 기반을 둔 이상적인 정치를 꿈꾸고, 선비들은 사랑방에서 시문을 음미하며 아름다운 글에 대한 미의식을 가졌다. 또 지식인들은 조선과 가까우면서도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중국에 대한 의식을 과감히 활자로 표현했다. 책이 쓰이고 널리 읽힌 뒤 고서(古書)로 보존될 즈음이면 새로운 사상과 현실이 잉태됐고, 이 사상과 현실은 다시 새로운 책을 잉태하며 이 과정을 반복해왔다. 책과 사람의 순환 고리 안에서 사상과 현실은 진보하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책과 사람은 돌고 돌지만 늘 같은 자리를 맴돌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의 사상과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상이 다르고, 중세 봉건의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조선전기 지배층보다 현대 민중의 사상이 더 진보했을 수 있음이 그 증거다.
이 책에서 소개한 『태평한화골계전』을 읽으며 옛 사람과 함께 웃고, 『맹자』를 통해 진정으로 민중을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 고심하며, 『발해고』를 통해 잃어버린 땅의 역사를 되새겨보자.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가 위 책들의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더욱이 조선시대보다 진일보한 줄로만 알았던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이들에게 투영해보면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이 처한 정치·사회·국제적 현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물론 따끔한 충고도 조선시대의 옛 서가에서 발견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김빈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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