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박원순 소셜 디자이너를 만나다

“새벽 2시에야 잠들었어요. 사무실서 나오느라 세수도 못하고 수염도 못 깎았는데 사진을 찍어도 되나 몰라.” 안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원순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가 햇볕이 잘 드는 창가로 자리를 옮기며 웃었다. 옆자리에 내려놓는 가방이 눈에 띈다. 커다란 검은색 배낭은 요새는 길거리에서 찾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평범하고 소박했다. ‘대한민국’에게 소송당해 그 어느 때보다 유명해진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듯하면서도 그의 소탈한 성품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오전 10시 인터뷰. 그러나 그는 이것이 오늘의 세 번째 인터뷰란다. ‘초 단위’로 살고 있다는 그의 말이 과장된 말은 아닌듯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인생과 그의 활동을 자세히 담은 책만 여러 권이다. 오전에만 네 번의 인터뷰와 점심 약속이 있는 그는 그만큼 언론에 자주 노출된다. 사람들이 그를 찾는 것은, 또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것은 왜일까. 그를 만나고 알았다. 그의 이야기는 귀 기울여 들을 만하다. 진부할 법도 한 이야기지만 그의 삶과 말은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담고 있었고, 들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한 번 바라보게 했다.

인터뷰|김의연 편집장  정리|구현정 부편집장  사진|양희정 사진부장


특별한 ‘대학생활’을 보내다

“저희는 『대학신문』 기자입니다. 『대학신문』은 서울대 학보사고요”라고 인사차 운을 떼자 박원순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는 “나도 알죠. 나도 서울대 중퇴생이야”라며 웃었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그 해 그는 서울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학교생활은 길지 못했다.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감옥에 갔고 제적당했다. 그러나 감옥에 가는 순간까지도 그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는 열사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그때 난 다른 학생들처럼 「타임지(Times)」를 읽으며 영어공부를 했고, 사회학개론이나 심리학개론 강의를 재밌게 듣고 있었죠.”

그해 4월 11일 김상진 열사가 유신헌법과 독재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할복 자결했다. 한 달여가 지난 5월 22일 관악캠퍼스에서 김상진 열사 추모식이 개최됐다. 그날 그는 도서관에서 코뮌에 대한 리포트를 썼고 저녁에는 이화여대 학생들과 미팅 약속도 잡혀 있었다. “당시에는 김상진 열사를 추모하는 자리라는 것도 몰랐어요. 다만 학생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모습에 분개했죠. 그 자리에서 항의하다 잡힌 거예요.”

그가 감옥에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이다. “감옥에서 학생운동 하는 분들을 만나 평생 친구가 됐어요. 그때가 아니었다면 시대를 앞서 나간 그분들을 어떻게 친구로 맞이했겠어요?” 감옥을 나와 그는 책들을 벗 삼아 온 세상을 방랑했다. “복학을 못 한 채 몇 년을 방황했죠. 할 일이 없어서 책을 읽었어요.”

신입생 시절도 다 경험 못하고 끝난 대학생활의 연장선상에는 그처럼 감옥생활과 방황의 시간이 있었다. 그는 이후 단국대를 졸업했지만 실제 대학생활은 거의 못한 셈이다. 그는 “그런데도 지금 이 사회의 지식인 대접을 받는 것은 남들이 누리지 못한 특별한 ‘대학생활’을 보냈기 때문”이라며 “서울대생들도 감옥 한 번 가봐야 되는데… 근데 요즘엔 예전이랑 달리 감옥 가기도 어렵죠?”라며 웃었다.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사한 그 해, 학생들은 개나리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교정을 누볐고 동시에 기나긴 어둠의 터널 같은 현실에 직면했다. “난 따스한 교정 대신 싸늘한 터널 속으로 들어간 거죠.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걸었기에 이 시대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고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이 제 역할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의 시간이 행복했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짧았던 대학생활이 그랬듯, 사법시험 합격 후 검사생활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감옥에서 예링(Rudolf von Jhering)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읽었어요. 그 책 시작에 ‘법률의 목적은 평화이며, 이에 도달하는 수단은 투쟁이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는 그 말을 실천에 옮겼다.

법조인에게 필요한 덕목.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그러나 그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1980년대, 그의 회상 속에서 정의를 앞장서 무너뜨린 이들은 다름 아닌 법조인이었다. “독재는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협조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이른바 ‘육법당’이라고 하죠? 수많은 협조자 중 많은 이가 서울대 법대 출신,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거든요.” 그는 다행이란다. 사람들 구속하는 것을 취미로 삼은 검사,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 대신 시민의 권리를 지켜주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 “내가 한 일은 큰일은 아닙니다. 그저 그 시대 고난받는 사람들 곁에서 무너지는 민주주의와 침해되는 인권을 회복하는 일에 동참했고 거기서 보람을 찾는 거죠.”

그래서일까. 그에게 ‘지식인’은 그 사회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그가 갑자기 시간을 한참 거슬러 조선 시대 선비들을 현재로 초빙했다. 선비들은 글을 읽었던 당대의 지식인층이다. 그들은 관리도 아니고 녹을 받지도 않았지만 나라 걱정, 사회 걱정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들을 공적 지식인이라 칭한다. 잠시 숨을 돌린 그가 가볍게 물었다. “지식인은 먼 존재가 아니에요. 대학생 여러분이 ‘지식인’인데, 어때요?”

인권변호사는 누군가를 후방지원하는 사람이다. 그는 누군가가 활약할 무대를 연출하는 스태프였다.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조연이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걸까. 1994년 ‘참여연대’ 활동을 시작으로 그는 시민운동가로 변신했다. 무대 위 주인공으로 나섰다. “과거에는 법률이 독재자의 흉기였잖아요. 난 거기 맞서 법률을 방패막이 삼았고요. 그런데 민주주의가 회복되면서 법률이 시민의 무기가 될 수 있겠더라고요.”

1993년 그는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의 변호를 맡는다. 한국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은 7년 만에 승소했고 이를 계기로 성희롱이 범죄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는 ‘남녀차별금지법’ 제정과 ‘남녀고용평등법’의 개정으로 이어진다. 그는 그렇게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1998년 서울시장 판공비 공개청구, 1999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2001년 부패방지법 제정, 2001년 이동통신요금 8.3% 인하 등 참여연대 활동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일어난 변화는 수없이 많았다. 그는 “내가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있던 7년간 족히 200여개가 넘는 법률이 제정됐을 거예요. 수많은 소송을 제기했죠. 지금 내가 국가에 소송당한 건 그때의 업보가 돌아온 건지도 몰라요”라며 웃었다.


사회를 디자인하다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아름다운커피’, ‘에코파티메아리’, ‘공감’, ‘이로운몰’, ‘희망제작소’까지. 스스로 ‘단체제조기’라 칭하는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단체명에 숨이 가쁘다. 법조인의 장기를 살리는 듯했던 참여연대 활동은 시민운동가로 탈피한 그의 런칭 쇼에 불과했다. 방랑벽이 있는 것처럼 그는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가 자족 능력을 갖추면 다시금 새 단체를 꾸리러 떠났다.

그런 그가 새로운 직업을 만들었다. 그의 명함에 박힌 낯선 직업명은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다. “난 늘 그 시대의 과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꾸준히 한 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비전과 화두로 시민 사회의 외연을 확장하는 일이 필요하다 여겼어요. 이를 통해 우리 사회를 업그레이드하는 거죠.” 소셜 디자이너는 그런 그의 행적을 설명하기 안성맞춤인 직업이다. “한국 사회를 어떻게 하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지 늘 고민하는 거죠. 사회를 디자인하는 사람인 거예요.”

현재 그는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갈지는 모른다. 새로운 둥지를 틀고 싶은 일을 물으니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우리나라 직업 수는 일본의 절반도 안 돼요. 농담처럼 청년실업자들에게 내가 자리 하나씩 주겠다고 하는데, 정말로 할 일은 많으니 하나씩 만들기만 하면 돼요”라고 웃는다. “신나는 일이 많은데, 내가 다 할 수는 없고… 누군가 해야 하는데…” 말미를 흐리는 그에게서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의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시민섹터, 시민자본, 시민기업에 대한 관심을 이어갈 예정이다. 시민운동과 기업의 결합체인 사회적 기업은 그가 대학생들에게 추천하는 종목이다. 또 그간 국내에 머물던 그의 시야가 세계로 넓어졌다. 좁은 지구촌 사회에서 나눌 수 있는 것은 돈뿐만이 아니다. “우릴 따라오는 나라가 많아요. 태국, 인도네시아 등의 나라에 우리의 경험을 전달하는 게 중요합니다.” 풀뿌리 지역운동과 글로벌한 이슈를 갖고 세상을 뛰는 젊은이가 나와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건 동물적 삶이지. 그 좋은 머리로 자기 혼자 잘살겠다고? 안 그래도 다 먹고 살아”라고 웃으며 그가 묻는다. “그건 목표가 아닌 수단일 뿐이죠. 인간은 더 고상한 목표를 세워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더 큰 야망을 가져야 하지 않아요?”


‘대한민국’에게 소송당하다

그는 현 정권을 ‘역주행 정부’라 꼬집고 현재를 ‘대퇴행의 시대’라 비판한다. 공권력을 동원해 강압적으로 억누르고 토목공사를 경제발전이라 생각하는 단순한 논리는 그가 보기에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다. “지난 한 세기는 우리가 따라가는 데 정신없었잖아요. 이젠 먼저 앞서가면 안 되나요?”라 물으며 그는 따지고 든다.

입바른 소리가 화근이 된 걸까. 한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그에게 근래 또 할 이야기가 생겼다. ‘대한민국’으로부터 소송당한 최초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흔쾌히 영광스럽다고 한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면 국가가 나서 소송을 제기하겠어요? 여러분도 한번 당하고 싶지 않아요?” 실제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단다. “요새는 사람들이 멀리서 뛰어와 악수하곤 해요. 안 그래도 유명한데 날 더 유명하게 만들려 작심을 한 건가?”

스트레스는 받지만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이명박정부 들어서 시민 사회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긍정적인 협치(協治)의 개념마저 깨진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도 그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감사하단다. “이명박 대통령 때문에 다시 한 번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탄탄해질 기회를 맞았잖아요. 전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늘 감사드리는걸요. 시련이 있기에 더 단단한 민주주의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어요?” 그는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라며 강조까지 한다.

그래서 그는 이번 일도 그의 모토대로 재밌게 대응한다. ‘온 국민 명예회복 대책본부’는 국정원의 소송에 대응하는 유쾌한 대책본부임을 내세우며 ‘내 이름을 빼다오!’, ‘소장 첨삭’ 등의 활동을 전개 중이다. 그는 ‘소장’을 ‘상장’이라 첨삭한 사례를 들며 “이 사건 자체가 희화적인 일이잖아요” 라고 웃었다. 그는 그러면서도 “일단 제기된 소송이니 중간에 취하되기보다 확실히 판결을 받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 한 사람만으로 끝나지 않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태껏 초당파적 입장에서 공동체와 공공선을 위해 일했다. 정치와는 초연하게 거리를 둔 편이다. 그가 일부러 정치에 가까이 가기 꺼린 것은 아니다. “정치란 우리 삶의 연장이에요. 먼 일로 여기지 않아요. 시민운동도 크게 보면 정치죠.” 그래도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그는 얼핏 정치에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 그가 정치에 부쩍 관심을 보인다. 인권과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분열과 갈등이 심각해지는 모습을 보며 고민한 결과다. “하류서 물을 정화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다, 상류에 가서 원천을 뜯어고치는 일을 해야겠구나 싶죠.” 그러나 여전히 그가 살던 시민사회라는 물을 떠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는 그 안에서 좋은 후보를 당선시키거나 그들을 교육하는 일을 구상했다. “사람이 자기 길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가능하면 정치권 안에서 좋은 리더들이 나오길 바랄 뿐이죠.”


크게 놀다보면 큰사람 돼있다

“잘 나가는 돈벌이 다 버리고 집 팔아 전세 살고 월급 받기는커녕 내 돈 써가며, 남들이 보면 미친 짓 하는 거죠. 그래도 어떡해. 이게 신나는 걸.” 그래서 그는 머뭇거림 없이 확신에 차 말한다. “평생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해. 하고 싶은 일 많지 않아요? 이해가 안 가. 인생은 다양하고 재미난 것으로 가득 찼는데 왜 그리 무료하고 지겹게 사는지.”

“요새 고시들 많이 보죠?” 긍정의 고갯짓에 “모든 사람이 가니 재미없을 텐데… 가도 경쟁이 치열하고 ‘one of them’이에요. NGO, NPO로 뛰어들면 ‘one’이 되는데…”라며 웃는다. 진부한 말이지만 그래서 그는 ‘다양한 경험’을 강조한다. “아는 게 고시같은 것들뿐인 경우가 많죠. 기성관념을 넘어 새로운 잣대로 세상을 보면 좋겠어요.”

그가 예시로 든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명은 독특하다.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등. “하나같이 진실한 말들뿐이에요.”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월급이 많고 권력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그는 그 상식을 뒤집으라고 한다. “서울대 나와 낮은 곳으로, 가장자리로, 헌신하는 곳으로 가면 나중에 그 사람은 제일 훌륭하고 출세한 사람이 돼 있어요.” 그는 택시 기사들이 차비를 안 받겠다고 해서 골치를 앓는다. 가는 곳마다 좋은 음식을 따뜻하게 대접하고 푹 쉬고 가란다. 그럴 때 그는 온 세상이 그의 것이 된다고 한다. “날 봐요. 이래 봬도 총리, 국정원장 후보에도 올라봤고 서울시장 나가라고 야단이에요. 쫀쫀하게 작은 이익 따지지 말고 크게 놀고 크게 생각하고 크게 헌신하면 자리는 저절로 와요.”

‘이야기’의 주인공이 꼭 박원순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선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도 그의 ‘이야기’가 단 몇명에게라도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라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이 사회를 더 희망적으로 ‘제작’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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