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을 만난 연인에게 싫증이 났지만 헤어질 명분을 찾지 못하던 그때 때마침 실용주의라는 복음이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이념 따위는 내다 버리자고 주장하는 그 이상한 이념에 한 표를 던졌다. 그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민주주의니 인권보호니 언론자유니 하는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 것들은 옷과 밥과 집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옳고 아름다운 것들을 과감히 내던지고 쉽고 유용하고 폼 나는 것들에만 헌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박’이 시대정신이 되고 ‘특목고’가 백년지대계가 되고 ‘뉴타운’이 주거정책이 되고 ‘토건’이 생태철학이 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우리가 함께 꾼 백일몽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실현된 셈이다. 그러니 이명박정부는 자유와 민주의 공화국이 낳은 기형아가 아니라 자본과 속물의 제국이 낳은 우량아라고 해야 옳다. 우리는 이제 어렵고 옳고 아름다운 가치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됐다.

지난달 28일 열린 용산참사 재판 제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검찰 측의 논리를 거의 대부분 받아들여 피고인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아무리 무정한 법 논리를 갖다 대도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권력과 자본의 공모 속에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긴 어려울 거라 믿었다. 그래서 재판부가 법 논리와 양심 사이에서 깊이 고뇌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재판부의 비정한 판결문에는 어떠한 고뇌의 흔적도 없었다.

지난 9일(월) 한 여성이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 ‘키 작은 남자는 패배자’라고 말해 공분을 사게 된 일도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 말은 홍대를 다니는 한 여성이 한 말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무의식이 한 말이다. 외모에 관한 한 ‘정치적 올바름’이 ‘위선’으로 조롱받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다. 문제의 여성 출연자와 제작진은 방송이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을 것이다. 표정과 자막에는 고뇌의 흔적이 없었다.

당위와 현실이 팽팽하게 긴장할 때 고뇌가 생겨난다. 당위의 힘이 과도하게 커지면 억압이 생겨나고 현실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면 마비가 올 것이다. 그러니 자주 흔들리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 것이고 고뇌는 건강한 사회의 증명서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어렵고 옳고 아름다운 것들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고뇌하는 법을 잊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톨스토이의 문학과 그의 삶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문호 톨스토이는 인류의 교사를 자임했지만 인간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의 가장 열등한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 괴리를 좁히기 위해 고뇌했고 그것이 톨스토이를 위대한 인물이 되게 했다. 고뇌는 공동체의 배수진이다. 그 진지가 무너지면 우리는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신형철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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