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물인
서울대라는 간판
내면의 목소리 부정하지 말고
자신만의 선택지를 넓혀가야

박주현 취재부장
장면 하나. 아들아, 서울대만 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게. 좋은 대학에 가면 네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어.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조금만 참자.

장면 둘. ‘서울대생 10명 중 4명은 대기업으로, 2명은 공공·행정기관으로, 1명은 외국계 기업과 중소기업으로, 2명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는 졸업자 진로 현황.

장면 셋. 고대 게시판.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겠다.

좋은 대학에 가면 선택지가 넓어진다고 했다. 막연하지만 일단 가고 보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학벌 사회에서 자유로워질 방법은, 나에 대한 구성원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은 역설적이게도 그 위계질서의 꼭짓점에 올라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그 수많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가. 어렵게 얻어낸 하나의 기득권과 주위의 기대 속에서 나의 선택지는 자유로운가. 획일화된 교육 속에서 ‘바른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압박감으로부터 당신의 선택지는 다양한가. 현재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 주위 사람들의 평가와 기대, 사회에 대한 봉사 또는 봉사로 보이는 것,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나 커질 수 있는가.

아직 이 사회에서 현실은 무겁다. 경제력, 명예, 권력, 평가, 기대, 착한 사람 되기, 모두 중요하다. 당장 먹고살 일이 다급한 상황에서 꿈을 꾸기는 쉽지 않다. 지속적으로 꿈을 꾸려면 최소한의 조건 역시 충족돼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그것이 우선순위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라는 하나의 간판은 나와 당신의 우선순위 선정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나는 글 쓰는 것이 좋아. 그런데 서울대에 온 만큼 어느 정도 돈도 벌어야 하고, 명예도 있어야 하고, 부모님의 기대도 만족시켜야 하고 사회봉사도 해야 하니 일단 다른 일을 먼저 하고 나중에 내 꿈을 이뤄야지. 합리화와 타협은 순식간에 이뤄진다. 사실 나는 평생 글을 쓸 만큼 문학적인 사람은 아니잖아? 글만 쓰려면 무엇 하러 힘들여 ‘서울대’에 왔지? 이게 내가 잘하는 일이야. 현실은 결국 처음의 꿈을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간다. 생각해보면 난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 같지도 않아. 내면의 목소리를 부정하며 선택지를 좁혀가는 그 평범한 과정들을 얼마나 더 되풀이하고 지켜봐야 하는가.

서울대 졸업생의 20% 이상은 뚜렷한 적성과 장래희망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다 4학년이 돼서야 진로를 정한다고 한다. 일간지에 따르면 기초교육원장은 “기업이 원하는 상황 판단력, 비판적 시각, 문제 해결력 등을 길러주기 위해 세미나식 수업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좋은 처방전이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자신의 장래희망을 찾는데 필요한 것은 뛰어난 능력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선택지를 믿고 실현해 나갈 수 있는, 불안을 껴안을 수 있는 치기와 열정이 아닐까. 지금까지 자신이 이뤄놓은 과거의 영광에 발목 잡히고, 화려한 미래의 목표에 목매기보다는 불안불안한 지금-여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서울대라는 거대한 간판 아래에서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것처럼, 언제라도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처럼 현재를 살아가고 싶다. 가슴이 터질 듯한 불안을 껴안으며 나와 당신의 선택지를 넓혀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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