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게재 후속기사]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 연구윤리지침 발표 그 이후

학계 주도의 첫 연구윤리지침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
학회 다양성에 대한 고려 부족, 구체성 떨어진다는 지적도

학계 인사의 고위 공직자 인선 때마다 논문 중복게재 논란은 심심치 않게 불거져왔다. 지난해 9월 정운찬 총리 인준 시에도 마찬가지 논란이 일었지만 중복게재 문제는 사실상 언론과 정부를 중심으로 논의돼왔다. 지난 2008년에도 구 한국학술진흥재단과 교육과학기술부가 공동으로 연구윤리 포럼을 개최하는 등 그동안 연구윤리지침 제정에 관해 학회가 주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드물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9월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학총)가 각 학회에 연구윤리지침을 배포했다. 처음으로 학계 주도로 중복게재에 대한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학총의 조치는 주목할 만하다. 이 연구윤리지침의 효력이 발생한 지 3개월이 지난 현재, 연구윤리지침을 둘러싼 교수사회의 반응과 각 학회 윤리지침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학계가 ‘처음’ 내놓은 중복게재 기준안

학총 이사회는 수개월에 걸쳐 여러 학회의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를 거친 끝에 지난해 9월 29일 표절과 중복게재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는 연구윤리지침을 발표했다. 이 지침은 중복게재를 “이전 연구결과와 동일하거나 실질적으로 유사한 학술저작물을 학술지 편집자나 저작권자의 허락 또는 출처표시 없이 다른 학술지나 저작물에 사용하는 학문적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그동안 타인의 연구물에 대한 ‘표절’ 행위가 명백한 연구부정이라는 점에 대해 학계에서는 비교적 충분한 동의가 이뤄졌지만 중복게재 판단기준은 의견이 분분해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또 최근 10년 사이 인터넷 검색이 활성화되면서 비전문가들에 의한 중복게재 의혹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아져 논란이 가속화됐다. 중복게재 사실이 쉽게 밝혀질 수 있는 만큼 중복게재 여부가 더는 묵인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번 학총 연구윤리지침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중복게재에 관한 명확한 기준을 세웠다는 의의가 있다. 연구윤리지침 제정을 주도한 한민구 전 학총 회장은 학총의 이번 조치에 대해 “외국 학계에서 중복게재를 엄격하게 규정하는 추세인 만큼 국내 학계에도 중복게재에 대한 확실한 기준이 제시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려는 취지”라고 말했다.


◇학회 다양성 포용하기엔 아직 미숙한 신생 가이드라인

학계에서 권고안으로 제시된 이번 연구윤리지침은 학계 주도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학회가 이 지침을 그대로 가이드라인으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른 언어로 논문을 번역해 해외 저널에 싣는 행위’와 ‘학술대회 발표문을 보완해 논문으로 싣는 행위’의  경우 중복게재 여부를 각 학회가 독자적 규정을 정해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총 연구윤리지침이 각 학회의 다양한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한국철학회의 경우 학총의 연구윤리지침과 다른 중복게재 관련 규정을 학회 차원에서 새로 추가한 상태다. 올해 3월 1일부로 개정된 한국철학회 윤리규정은 중복게재 유형을 세부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시되던 중복게재의 여러 유형을 분류하고 그중에서 ‘장려해야 할’ 중복게재를 따로 유형화해 오히려 적극 권장하고 이에 가산점까지 부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한국철학회 편집위원장 이남인 교수(철학과)는 “논문이 해외 학술저널에 번역돼 출간된다면 그것은 연구부정행위가 아닌 장려돼야 할 중복게재”라고 말했다. 인문·사회계의 번역 논문은 그 자체로 학문의 국제화와 사회적 확산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당수가 영어로 발표되는 이공계 논문과 달리 인문·사회계 논문은 한국어로 발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학총의 연구윤리지침이 각 학문분야의 특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국불어불문학회 이기언 편집위원장도 “학총 연구윤리지침과 별도로 학회만의 윤리지침을 적용하고 있다”며 “동일 논문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 해외 저널에 싣는 경우 연구실적에 중복으로 계산되지 않도록 한 논문의 등록을 취소하면 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학술대회 발표 논문을 학술지에 싣는 행위를 중복게재로 정의한 부분에 대해서도 다양한 반응이 나타난다. 노종선 교수(전기공학부)는 “학술대회 발표문의 경우 논문보다는 단순히 연구결과 공유의 성격이 강하다”며 너무 엄격한 중복게재 기준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한국철학회 역시 학술대회 발표문을 논문으로 다시 발표하는 것은 부정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학자 간 자유로운 소통이 이뤄지는 학술대회 발표문을 논문으로 발전시켜 학술지에 싣는 것은 정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학총 연구윤리지침, 실질적 ‘가이드라인’ 되려면?

물론 이공계를 포함한 상당수 학회에서는 학총의 윤리지침을 환영하며 이를 각 학회 운영지침에 반영하고 있다. 김윤영 대한기계학회 국문 편집위원장은 “학총의 연구윤리지침은 확실한 기준을 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기계학회 윤리규정에도 대부분 반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어국문학회 편집위원인 윤여탁 교수(국어교육과)도 “학계에서 표절 및 중복게재에 관한 윤리적인 문제를 의견수렴을 통해 정리한 것은 긍정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학계에 배포된 학총 연구윤리지침은 각 학회에 ‘권고’ 형태로 제시될 뿐 법적 규정으로서 강제성을 지니지는 않기 때문에 각 학회에서 이를 적극 활용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있으나마나인 지침’이 될 수 있다.  연구윤리지침이 실질적 효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각 학회의 다양한 성격을 고려하면서도 중복게재의 정의 및 관련 문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지침의 소급 적용에 관해서도 각 학회가 결정할 사안으로 남겨두는 바람에 학계에서는 과거 중복게재 사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면이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 차원에 머무르는 기준이기에  각 학회가 구체적 사안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으로서는 아쉬운 점이 있는 것이다.

한편 지난해 8월 학총 제4회 통합학술대회에서는 유럽처럼 학문분야별로 학회 연합단체가 연구윤리 가이드라인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지침에 수많은 학회들의 세부사정을 모두 반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대신 ‘학문’ 분야별 특성은 고려한다는 점에서 좋은 방안으로 꼽힌다. 이를 위해선 각 학문특성과 학회의 성격을 가능한 구체적으로 지침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학계 내 의견수렴과 논의가 활발히 진행돼야 할 것이다. 학총 및 한국연구재단의 지속적인 연구윤리지침 연구는 물론 실질적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한 학계의 자발적인 움직임과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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