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 또한 우리의 역사다”

▲ © 타케시마 에미 기자
▲ 친일 역사 청산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36년간의 일제 강점 시기가 끝난 후 식민지 시대에 대해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친일을 했던 이들이 기득권층이 되고, 계속 확대 재생산됐다. 4년 남짓 나치 하에 있었던 프랑스는 해방 후 국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만 2천명이 넘지 않았나.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친일 역사 청산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친일’이라는 말은 ‘공산주의’라는 말과 함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카더라’식으로 어떤 사람이 친일을 했다고 근거 없이 매도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끝장이 난다. 따라서 친일 역사 청산은 무엇보다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문제다.


▲ 그렇다면 친일 역사 청산은 어떤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가.

벌써 해방된 지 60년이 넘었다. 그 때 20대였던 사람은 80살이 넘었고 대부분 이 죽었다. 친일 당사자에 대한 신체적ㆍ법적 청산을 하기는 어렵게 됐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역사 청산’이다. 이는 역사에 분명하게 그때의 일을 기록하고 시대를 정리하는 일을 의미한다.

친일파들을 우리 역사에서 소외시키거나 그들이 자신의 행적을 숨기기에만 급급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변명이라도 들어보고, 그들의 고통과 번민 역시 우리 역사 속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들이 잘못을 시인한 것 혹은 그렇지 않은 것들을 역사에 적어 놓고 그 후 그들과 화해하며 그들의 고통을 느끼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시는 이런 역사를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친일인명사전 역시 그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그 사람들을 단죄하는 것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 친일진상규명법이 친일보호법으로 전락했다는 의견이 있다. 특히 문화곀劇解�인사들은 이번 법안에서 제외됐다. 이렇게 되면 각계에서 제기되는 친일 행각 의혹들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지 않은가.

친일진상규명법은 새 국회에서 개정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법답게 만들어야 한다.

일제 하에서 학문 활동을 하고 글을 지었다고 해서 다 친일을 한 것은 아니다. 일제 하에 활동했으니 당연히 일제와 내통해서 활동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그 사람의 논문, 글, 작품 등을 통해 친일 행적을 살펴봐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악질적인 관리나 경찰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진상 규명 이후에 철저히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친일진상규명법에 따라 친일인명사전편찬을 지원할 수 있는가.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이 전액 삭감된 해에 내가 국사편찬위원장이 됐다. 취임 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것은 대단히 필요하다는 것과 법률적 근거에 따라서 도와 줘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또 친일 관련법이 아직 없으니 지금까지의 방식대로라도 예산 지원을 하면 좋다는 쪽으로 합의했다. 비록 한시적이지만 친일진상규명법이  제정됐기 때문에 그 법에 따라 독립적인 새 기구가 생길 것이다. 이 문제는 그 기구에서 결정할 사항이다.


▲ 중국의 ‘동북변강사지여현상계열연구공정(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 등 동북아시아 역사 관련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발해사나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중국 동북 지방의 조선족들이 민족적겳돼嶽�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으려는 작업이다. 그러나 “아무리 영토가 바뀌었다고 해도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는 한 북한 학자의 말처럼 중국이 지금 옛 고구려 영토를 가지고 있다고 역사마저 편입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에 관해서 말하기 전에, 일본이 우리보다 발전된 형태의 교과서를 내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획일화된 국정교과서를 사용하는 우리와 달리 일본은 학계의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교과서 형태(검인정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우리의 항의나 주장을 제대로 수용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신네들의 역사 교과서부터 발전시키는 것이 우선이지 않느냐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 제7차 교육과정에서 근현대사 부분이 선택 과목이 됐다. 이에 대한 생각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1년까지는 국사를 필수로 배우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근현대사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어느 사회에서나 국민ㆍ민족 교육을 위해서는 국어와 국사가 필수적인데 주당 과목 시수를 늘리려고 하면 ‘과목 이기주의’로 몰아가는 행태가 아쉽다. 다만, 근현대사 부분이 검인정 교과서가 된 것은 학계의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 국사편찬위원장으로서 특별히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먼저 이전까지의 성과를 창조적ㆍ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남북 역사학 교류를 활성화 시킬 것이다. 적어도 1945년 이전까지의 역사는 하나이기 때문에 남북이 함께 연구해야 할 부분이 있다. 또 자료 교환도 활발히 이뤄져야 민족겳돼�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두번째로 국가 기관으로서 가져야 할 정책적 사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즉, 고구려ㆍ발해 문제나 강제 징용 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해외 교민사 정리를 추진 중이다. 일례로 우리나라는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하지만 그에 관한 연구나 자료 수집이 거의 돼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에 역점을 두고 활동할 예정이다.


▲ 후배 및 후학들에게 역사학자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해 달라.

과거의 사실들을 현재의 자신 및 삶에 연관시킬 때 역사 속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역사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평소에 역사를 일상화해서 지혜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한다.

보통 역사를 얘기할 때 화려하거나 영광스러운 것만 가치있게 생각하는데 고난의 역사일수록 깊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실패한 역사는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자산이 될 수 있고 성공한 역사는 성공했기 때문에 우리의 갈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1982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를보여주는 이만열 위원장. © 타케시마 에미 기자

 

 

 

 

 

 

 

 

<이만열이 걸어온 길>

열린 민족주의 사학자의 한 평생

▲1938년 경남 함안 출생

▲1957∼1986년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0∼1980년 숙명여대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신군부에 의해 4년간 해직)

▲1984∼2003년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복직)

▲1990∼2000년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소 소장

▲1998∼2003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연임)

▲2001∼2003년 6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2003년 6월 이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대학 재학 중 서양사에 관심을 두고 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다가, 군대에 있을 때 선임병으로부터 “서울대 사학과를 다니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는 얘기를 듣고 국사에 눈을 뜨게 된 사학자 이만열. 그는 단재 신채호의 고대 역사관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중 신채호의 사관이 만들졌던 당시  배경에 관심을 가지면서 근현대사를 전공하게 됐다.

그는 숙명여대 재직 중 신군부의 집권을 반대해 1980년 해직을 당하기도 했고,  해직 후부터 근대 기독교사에 대해 지속적인 연구를 해 왔다.

또 역사학회, 진단학회, 한국사학회, 도산학회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현재 제7대 국사편찬위원장을 맡고 있다.

‘열린 민족주의사학자’로 자신을 규정하는 이 위원장은 외국인 근로자 돕기를 10여 년째 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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