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하불명(燈下不明). 북경에서 한 학기 강의하면서 우리가 중국사회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천년 동양문화의 젖줄이며 우리 선조들이 섬겨온 상국(上國). 600년 조선조의 유일한 선린이었고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여 풍전등화의 조선왕조를 구해준 역사적 우방국. 소위 세계화라는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살면서 가장 가까운 이웃 중국에 대해서 이토록 무지했다니. 20세기 이념대결의 부작용이라는 변명도 가당찮다.      


동숭동 시절 진아춘의 단골 메뉴였던 자장면만 해도 그렇다. 자장면은 중국음식의 대명사적 존재지만, 원래 중국요리는 아니고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변형 중국음식이라는 가르침을 선배들로부터 받았고, 우리세대는 여기에 ‘면을 주식으로 하는 산동인들이 초기에 한국에 많이 진출하여 중국음식점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라는 민속학적 해석까지 첨부하여 후배들에게 전수하였다. 헌데, 믿었던 나의 이 진실은 북경생활 일주일만에 완전히 허구였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대학가 근처에 있는 분식집들의 단골메뉴며, 북경 곳곳에서 자장면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북경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점이라고 안내받아서 간 식당의 간판에는 자장면대왕(炸醬麵大王)이라고 써있었다. 자장면은 원래 북경지방에서 개발된 음식이란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오해였다면 현실에 대한 인식은 오류였다고 해야겠다. 짧은 체류 기간이었지만 나는 북경에서 많은 공산당원, 공산당 간부들과 만났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공산주의자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만난 공산당원 중에는 지식인들, 공무원들도 있었고, 조선족 출신 청년 공산당 소속 학생들도 있었으며, 공산당 대학에서 가르치는 우리 동포도 있었다. 나는 이들과 함께 밤늦도록 술도 마시고 함께 노래도 불렀다. 학교나 학계의 소식도 교환하고, 장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에 대해서 얘기도 하고, 또 교수의 박봉에 대해서 공감하고, 공무원들의 부조리와 무능력에 함께 개탄하기도 하였다. 서로 배우는 보람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동행이 있기에 기쁨이 배가되었던 자리였으나, 한편으로 우리들의 관심과 의견은 자주 다르고 상반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자본주의 학자여서 그리고 그들이 공산주의 세계에서 일생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에우리들의 의견이 구조적으로 상충될 수밖에 없었던 일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공산당원증을 가진 어떤 학자도 최근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공산주의 체제의 필연적 승리로 돌리는 사람은 없었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궁극적 파멸을 예언하는 사람도 없었다.

북한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직접 북한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중국학자들도 여러명 만났다. 공식적으로 중국과 북한은 형제지국이다. 그러나 중국학자들은 북한을 가리켜 형제지국 운운하지 않았다. 남한에서 온 손님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다. 사실 중국의 지식인들은 북한을 사회주의 국가로 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들이 권력을 세습하는 체제는 자본주의 이전의 봉건제도라는 것이다. 교육제도 역시 중국은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하고, 북경의 청화대, 북경대, 인민대, 그리고 상해의 복단대는 명실공히 중국 엘리트의 최고 산실로 높이 인정받고 있었다. 교육의 목적을 평준화라고 하고 서울대학교 폐지론을 주장하는 우리 현실. 타산지석의 교훈이 절실한 때다.

정홍익 행정대학원 교수ㆍ사회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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