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규
쇳대박물관장

정부의 일방적인 문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문화인으로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지켜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학신문』은 문화 사업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코너를 마련했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 문화계 현실의 또다른 단면을 보고자 한다.

쇳대박물관 최홍규 관장은 동숭동에서 20여년간 철물점을 하다 2003년 한국 전통 자물쇠를 수집·보존하는 쇳대박물관을 설립했다. 그는 급변하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의  전통을 지키는 열쇠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는 최근 날로 변해가는 서울의 거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 시집가던 누이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시던 어머님의 가르침. 이게 무슨 시대착오적인 발상인가 싶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변화와 적응을 강요하는 시대에는 오히려 훌륭한 가르침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꽂혀있는 실용서들을 펼쳐보면 토익 점수나, 학점, 컴퓨터 자격증 등을 들먹여가며 그것들이 없으면 불행한 것이라고 위협하고, 그것들에 몰두하는 것이 ‘자기계발’이라며 권장한다. 사회 전반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계발하는 데 혈안이 돼 있고 그렇게 새로운 질서에 맞춰 변화하고 발전하지 못하면 우리 삶이 파국을 맞이하리라는 불길한 암시가 유령처럼 전 지구를 떠돌고 있다.

하지만 컴퓨터와 영어회화는 기본이고 무엇 때문에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려면 주연과 함께 조연도 있고 엑스트라도 있어야 하는 법인데 그러나 요즈음 사회는  모두가  주인공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생산성을 중요시하는 농경사회에서도  나름대로 법칙이 있었다. 농부는 농사일 열심히 하면 되고 대장장이는 담금질 잘하고 대장장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 됐는데 요즘은  모두가 슈퍼맨이 돼야만 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조금 수가 부족하면 어떠랴. 물건 사고 파는데 셈할 수 있으면 되고. 영어를 좀 못해 바디 랭귀지면 어떠랴. 덜 세련됐지만 의사소통만 되면 됐지. 나는 아직도 컴퓨터 자판을 독수리 타법으로 두드린다. 조금 느리지만 나만의 사용법으로 큰 불편함을 못 느끼고 있다. 그저 자판을 잘 두들기는 사람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풍경이 달라지는 서울거리, 매일 매일 다르게 옷을 갈아입는 광화문 광장,  휘황찬란한 서울의 알록달록한 야간조명이며 복잡한 세상에서 서울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광화문 광장만 해도 그렇다. 하지만 북악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멀리 북한산을 뒤로하고 있는 경복궁 앞 광장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의 심장 같은 곳이 아니었던가. 조선백자가 가지고 있는 여백과 순결미, 우리 선조들이 갖고 있는 미의식을 느낄 수 있게, 그곳을 고즈넉하고 좀 더 여유롭게  비워 두면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노란 단풍잎으로 늦가을을 장식하던 세종로가 그리운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사회가 강요하는 변화와 적응에 귀머거리가 되고 장님이 되고 벙어리가 되어 보자.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활기 넘치는 서울을 사랑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같아 보이기도 하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새로 만드는 것은 쉽지만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기는 힘든 일인데 이제 숨 고르기도 하고 잠시 쉬어가면서 뒤도 돌아보고 좀 여유를 가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 무조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문화 선각자라고 착각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우리 문화를 보존하는 것 자체가 전통을 만들고 차별화된 문화를 만드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아니,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문화 아닌가 싶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남들이 제시한 기준을 좇아야 한다는 조급증 때문에 이런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따듯한 사람보다는 차가운 머리를 가진 사람을 원하는 것 같은 요즘 사회. 내 자식들은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매일 매일 혼돈 속에 살고 있다. 좀 영악해져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면서도 추운 날씨에 박물관 옆에서 노상에서 붕어빵을 굽는 늘 미소로 인사를 하시는 아주머니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주머니를 뵐 때마다 우리 곁에 있는 새가 파랑새인지 까마귀인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전 국민이 백과사전이 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구겨져서 안 보이는 부분 때문에 모든 분야를  대충 아는 구겨진 백과사전도 있고 찢어진 백과사전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물쟁이로서 철물밖에 모르는 나. 철물일 외에는 잘하는 게 없는 나. 내가 좋아하는 것은 확실하게 알고 관심 없는 일은 전혀 모르는 나를 내 친구는  ‘찢어진 백과사전’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런 소리가 싫지만은 않다. 나는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현실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생각을 갖고 있는 내가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100미터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조금 늦는다고 문제될 건 없다. 오십대 중반으로 향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마라톤 반환점을 향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가짜 친구와 진짜 적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으려고 나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오늘도 나는 열심히 찾고 있다. 오늘 저녁엔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30년 후의 황혼 일기를 미리 써봐야 겠다.

오늘도 박물관인의 한 사람으로서 철물점 주인으로서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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