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전문에 명시된 ‘불의에 항거한 4·19 혁명 정신’은 5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까. 4·19 혁명 세대가 몸 바쳐 얻은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현재 대학생 사회에서 꾸준히 제기되는 ‘실천하지 않는 지성’에 대한 비판은 우리가 그동안 4·19 혁명 정신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되짚어보게 한다. 『대학신문』은 4·19 혁명 50주년을 맞아 4·19 세대와 현재 대학생들 간의 자유대담을 통해 4·19 혁명 정신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요인이 혁명을 이끌어냈던 것인지, 또 4·19 혁명이 대학생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봤다.
사진: 신동호 기자  clavis21@snu.kr
삽화: 유다예 기자  dada@snu.kr

김시현 사월혁명회 이사장

민홍섭 고려대 경영학과·09

유하은 서울대 정치학과·09


















황건 전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차주연 연세대 경영학과·09
이정빈 연세대 자유전공·10

















4·19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은 해방 이후 정부 소유로 바뀐 일본인 재산을 자본가들에게 할당했고 제분ㆍ제당ㆍ면방직 공업 등 ‘3백(白) 산업’으로 불리는 산업화를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하지만 1957년 미국의 원조가 끊기자 원자재 부족으로 3백 산업의 가동률은 급격히 낮아졌다. 또 정부의 산업화 정책은 한국 경제의 근간을 이루던 농촌의 경제 상황마저 악화시켰고 국민들은 극심한 실업난, 물가 상승, 조세 부담에 시달렸다. 민중은 이런 생활고뿐 아니라 독재 정권의 억압 정책에도 신음했다.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민중을 탄압했다. 1950년대의 혼란한 시대상황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확산시켰다.

이정빈=4·19 혁명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1950년대 사회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4·19 세대가 몸소 느꼈던 1950년대 사회 상황은 어땠습니까? 또 그 속에서 어떤 것을 느끼셨습니까?

김시현=당시 혁명을 이끌었던 4·19 세대는 1950년대의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는 계속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죠. 우리는 해방 후에 초등학교를 들어갔고 당시 일반적이지 않았던 대학진학도 했습니다. 아마 당시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지식인층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6·25 전쟁 이후 한국은 폐허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이 힘들 정도로요. 한국 경제의 근간을 이루던 농촌이 완전히 무너져 실업자도 엄청났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 국민 연간 소득은 72달러밖에 되지 않았어요. 아마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피부로 느껴지는 사회 모순에 우리는 대학생으로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사회를 개혁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문제의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하은=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사회 현실은 무시하고 자신의 정권 유지에만 열을 올려 각종 비리와 탄압이 이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민중들의 불만은 고조됐고요. 당시 정치 현실은 어땠나요? 또 이승만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시현=그렇죠. 대학교 2학년이 되니 오히려 정세의 모순은 더 심화되더군요. 내가 보기엔 대통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민생을 챙겨야 할 것 같은데 자신의 독재 기반 마련을 위해서만 노력했습니다. 이승만의 휘하에 있던 자유당은 장기 집권을 위해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고 진보당을 탄압하기 위해 당수인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형했습니다. 경향신문을 폐간하면서 언론탄압까지 강행했고요. 민생을 위한 노력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차주연=그런데 사실 사회적 모순이 지적되지 않은 시대는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촛불시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였고 자신들의 뜻이 정책에 반영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촛불시위를 혁명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대규모로 진행된 촛불시위도 정권에 퇴진은 커녕 정책의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4·19 혁명은 달랐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학원 자유화를 외치며 시작했던 시위는 전 국민을 동원하며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로 확대됐습니다. 이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큰 시사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어떠한 요인이 4·19 혁명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 건=우리의 시대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승만의 독재 정치는 3·15 부정선거에서 극에 달했고 우리는 이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직접적으로 4·19 혁명이 3·15 부정선거에 의해 촉발됐다고는 하지만 누적된 이승만 정권의 모순이 혁명의 기반을 형성했죠. 해방 이후로 독립 운동하던 사람들은 다 내쫓고 분단된 정부를 세우면서까지 자신의 정치 기반을 형성해 나갔으니까요. 6·25 전쟁의 장본인이라는 평가도 만연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 친일 인사들을 국정 요직에 앉히기까지 하니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저 참고 바라보기만 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우리는 학내 비밀 서클을 만들어서 사회 문제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때 대학에는 반공을 위한 학도호국단이 설치돼 있었어요. 드러내놓고 사회 비판을 했다가는 그대로 잡혀가는 거죠. 서울대 내 신진회, 사회법학회나 고려대의 협진회 같은 비밀 서클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사회에 대한 세미나나 토론을 개최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이루며 비판, 문제의식을 키워나갔습니다. 자발적인 학생 단체에서의 자유로운 논의가 4·19 혁명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시현=나는 1950년대 당시 정치·경제적으로 낙후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바꿔보고자 했던 대학생들의 좌절감이 혁명을 이끌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정권은 교육으로 다져진 대학생들을 위험분자로 생각하고 철저히 억압하기도 했고요. 실제로 내가 다니던 전남대에서는 국가에서 멸공궐기대회를 시행하면 모든 학생들이 동원됐습니다. 학내 사찰도 극심했죠. 대학 내 언론이나 공론장이 형성될 틈이 없었습니다. 앞서 말했던 사회 모순으로 인해 누적됐던 울분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들었습니다.

4·19 혁명의 과정

  2월 28일 대구에서는 그동안 관제 시위에 동원됐던 고교생들의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각종 행사를 개최해 일요일에도 학생들을 등교시켜 관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은 거셌다. 3월 15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원 자유화와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됐다. 3월 15일 선거는 부정으로 얼룩졌고 결국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가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날 마산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 19일 오전부터 10만명이 넘는 학생들은 시위를 벌였다. 서울 시내는 순식간에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학생들은 미리 약속했던 계획에 따라 각 대학에서 총궐기 선언문을 낭독하고 중앙청(현 광화문 일대)을 향해 행진했다. 서울 시내는 완전히 아수라장이었고 시위대는 재선거, 이승만 정권 퇴진 등 독재 규탄과 민주수호 및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민홍섭=비밀 서클을 중심으로 4·19 혁명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고 그것이 혁명의 중요한 요인이 됐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요즘 학생사회는 정말 진지하게 정권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는 어렵습니다. 사회에 모순이 있다면 그것을 지적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문제제기가 이뤄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4·19 혁명이 촉발되기 직전 비밀 서클에서 논의됐던 내용은 어떤 것이었으며 실제 혁명에서는 어떻게 실행됐는지 묻고싶습니다.

황 건=대구의 2·28 의거나 마산의 3·15 의거 소식이 서울에도 전해졌습니다. 벌써 중·고등학생들은 혁명을 시작했던 것이죠. 그래서 대학생들도 지체 없이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다들 알다시피 4·19 혁명은 주도 세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울 시내 7, 8개 대학의 학생들은 하나 둘 모여 어떻게 혁명을 이뤄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주도적인 세력은 없었지만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는 의식은 대학생들에게 공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정빈=요즘에는 시위대를 마냥 곱게만 바라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시위대를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부정적인 요소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고요. 이와 관련해서 4·19 혁명 당시 시민들의 분위기가 궁금합니다.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시위라 서울 시내가 마비됐던 만큼 혹시 시민들 중 못마땅한 시선으로 시위대를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나요?

황 건=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청계천 상인들이 벌떼같이 몰려나와서 환호하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군인들은 무차별적으로 기관총을 쏘고 최루탄도 투척했습니다. 정말 많은 학생이 죽어나갔습니다. 내가 공격을 피해 골목으로 간신히 기어들어가자 아주머니들이 집으로 피신시켜줬던 기억이 납니다. 온 시민들이 우리의 혁명에 동조했습니다. 광화문 일대는 혁명의 인파로 가득 메워졌습니다.

  당시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 열사가 생각납니다. 어머니가 장사에 나가고 집에 없자 진 열사는 “겨레의 앞날과 민족해방을 위해 목숨 바치겠습니다”라는 편지를 써놓고 시위대에 참가했습니다. 결국 편지는 유서가 됐습니다. 중학교 2학년의 어린 학생이 봐도 사회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 열사는 우연히 시위에 휩쓸려 나가 숨진 철없는 여중생이 아니라 결연히 항쟁에 나서 목숨을 바친 열사였죠. 진 열사는 4·19 혁명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학생과 일반 시민 모두가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4월 26일 11시경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 사퇴와 선거 재실시 등을 발표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12년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렸다. 시위대가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고 서울 시내는 혁명을 이뤄냈다는 환희로 가득했다.

유하은=대규모로 단행된 4·19 혁명은 결국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성취감과 더불어 어쩌면 일종의 허무함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려고 하셨지만 이승만의 하야 선언으로 혁명이 일단락되지 않았습니까?

황 건=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크게 갖고 일으킨 혁명이 이승만 정권의 하야 선언으로 결실을 맺었지만 학생 사회는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계획도 나와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때부터 부랴부랴 앞으로 우리가 어떠한 과제를 수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통일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분단된 국가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수립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서울대 내에 민족통일학생연맹(민통련)을 발족해서 통일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대학교에서도 민통련을 결성해 동참했습니다.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5·16 쿠데타 이후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와 육군사관학교 출신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했다. 4·19 혁명이 이뤄낸 민주 정부는 다시 군부 세력 아래로 들어갔고 전국에는 다시 계엄령이 선포됐다.

차주연=4월 혁명이 끝나고 1년 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일각에서는 4·19 혁명이 군사 쿠데타로 인해 본래의 민족 통일이나 진정한 민주화라는 과제를 완수해내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단행했던 4·19 혁명이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전복됐을 때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황 건=사실 학생사회에서는 군사 쿠데타를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민족자주통일 구호를 외치며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하려고 하는데 군사 쿠데타가 우리 계획을 망칠 걱정뿐이었죠. 군사 쿠데타 이전에 서울대에서는 4·19 혁명 일주년을 기념하며 침묵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무력으로 시위를 하면 바로 군대의 진압이 있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리 조직 명부 같은 것들은 없애고 앞으로의 상황에 대비했습니다.

  또 나는 문제 상황을 좀 더 거시적으로 바라봤습니다. 혁명의 과제를 완수해 우리 세대의 업적을 세우기보다는 진정으로 한국 사회를 위한 길을 모색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하에 있던 집권 계층은 민주화 운동을 억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목적의식을 갖고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지만 상부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했습니다. 군사 쿠데타 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말살시키는 후진적인 계획에도 비판의식 없이 참가했던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지식인이라면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혁명이 좌초됐다고 좌절하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그 일환으로 통일 운동에 참여했던 것이고요. 분단된 상황에서는 결국 역사적 비극이 계속될 것이니 여기서 운동을 멈추고 주저앉기보다는 계속 현실에 참여를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난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홍섭=하지만 저는 우리 세대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내에서 진보적이거나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면 운동권 학생, 제도를 벗어나려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곤 합니다. 한마디로 요즘 대학생은 비판 의식이 있어도 직접적으로 그것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시현=사실 4·19 혁명 당시 대학생들의 주장도 소수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식민지 교육으로 무장된 대부분의 시민들은 왜 우리가 이승만 정권 하의 억압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각성된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민중의 의식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혁명 당시 동국대 학생들은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여러분 같은 지식인일수록 사회 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끼고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대담을 끝내며

이정빈=지식인으로 책임의식을 가지라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서로 사회 문제에 대한 소통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진지하게 사회 문제에 고민하거나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학생들 스스로 앞으로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진리를 모색하고 추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하은=오늘 대담이 있기 전 저는 4·19 혁명의 발단에는 시대적 분위기나 당시 학생의 성향 같은 요인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족이 분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 혼란 상황도 그렇고 당시 학생 사회 자체는 우리와 달리 좀 더 참여적인 성향이 강했다고요. 우리가 사회에 무관심하고 소극적인 것은 사회구조적인 요인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변명이 아닐까하는 진지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열정을 갖고 참여한다면 우리 세대의 혁명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