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에도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윤리와 도덕 혹은 정치의 영역에 있는 것들까지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믿고 또 믿는 대로 실천하는 신실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신념과 지나치게 닮아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관념이다. 정치적 성숙에 대한 기대는 경제적 성장에 대한 환상으로 대체된 지 오래고, 광장으로 나가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면 당국은 정치적 응답을 대신해서 벌금 고지서를 내민다. 예술은 문화콘텐츠로 변신해서 문화 ‘상품’으로 전향할 때 각광받고 개인 주체들의 자유를 향한 의지는 ‘자기계발’을 통한 경쟁력 지수에 사로잡혀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부자 되세요’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메시지가 돼버렸다. 저 숫자들과 계산가능성의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속물화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계산 불가능한 것들,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무엇인가를 우리 삶에서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여론도 거세고 재경부에서도 그럴 계획이 없다고 하니 죄악세 도입은 아마 실현되기 어려울 것 같다. 담뱃값 인상에 대해서라면 수많은 애연가들과 함께 우리도 가슴 쓸어내리며 안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죄악세의 도입 여부만큼이나 죄악세라는 명칭이 상기시키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관념 또한 문제적이다. 우리의 삶이 ‘죄지은 자에게 세금 있을진저’의 누추한 형태가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으로 남아야겠지만, 우리에게는 가이사의 것이 아닌 것, 계산 불가능한 것 또한 있지 않겠는가.
권희철 간사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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