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세. 흡연이나 음주처럼 그 행위에 참여하지 않은 타인에게도 사회경제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품목에 부과하는 세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난주 일부 언론에서 ‘죄악세’가 도입될 예정이라고 보도하면서 이 기묘한 이름이 인구에 회자됐다. 기획재정부가 곧장 죄악세 도입 계획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죄악세 도입에 따라 술담배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예측은 ‘부자 감세’에 따른 재정악화를 해결하기 위한 ‘서민증세’ 정책의 일환이 아니냐는 우려로 이어졌다. 기획재정부의 해명에도 애연가들과 애주가들의 불만은 조세정책의 합리성에 대한 논의와 결합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죄악세 논란을 지켜보면서 자꾸만 엉뚱한 생각이 든다. 죄악에 부과하는 세금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물음은 단순히 잘못 붙여진 이름에 대한 말장난일 뿐일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혹시 ‘죄악세’라는 이름이 우리 사회의 어떤 경향에 대한 증상과 같은 것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죄악에도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윤리와 도덕 혹은 정치의 영역에 있는 것들까지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믿고   또 믿는 대로 실천하는 신실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신념과 지나치게 닮아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관념이다. 정치적 성숙에 대한 기대는 경제적 성장에 대한 환상으로 대체된 지 오래고, 광장으로 나가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면 당국은 정치적 응답을 대신해서 벌금 고지서를 내민다. 예술은 문화콘텐츠로 변신해서 문화 ‘상품’으로 전향할 때 각광받고 개인 주체들의 자유를 향한 의지는 ‘자기계발’을 통한 경쟁력 지수에 사로잡혀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부자 되세요’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메시지가 돼버렸다. 저 숫자들과 계산가능성의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속물화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계산 불가능한 것들,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무엇인가를 우리 삶에서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여론도 거세고 재경부에서도 그럴 계획이 없다고 하니 죄악세 도입은 아마 실현되기 어려울 것 같다. 담뱃값 인상에 대해서라면 수많은 애연가들과 함께 우리도 가슴 쓸어내리며 안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죄악세의 도입 여부만큼이나 죄악세라는 명칭이 상기시키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관념 또한 문제적이다. 우리의 삶이 ‘죄지은 자에게 세금 있을진저’의 누추한 형태가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으로 남아야겠지만, 우리에게는 가이사의 것이 아닌 것, 계산 불가능한 것 또한 있지 않겠는가.

권희철 간사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